1996년 1월 6일, 서울 마포경찰서 형사계에 ‘변사(變死) 사건 보고서’가 접수됐다. 김광석, 만 32세, 가수, 새벽 4시 30분 자살 추정, 마포구 서교동 ○○빌딩 4층 집 거실에서 옥상으로 통하는 층계 난간에 전깃줄로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부인이 발견, 유서 없음…. 나는 서울 시내 경찰서를 돌면서 사건· 사고를 챙겨 보고하는 수습 기자였다. 수습 기자들은 즉시 김광석의 죽음을 회사에 보고했다. 몇 몇은 울먹울먹했다. 김광석의 사망 소식을 속보로 내보낸 방송사는 한 곳. 보고를 받은 ‘윗선’이 ‘가수 김광석’을 잘 몰라 벌어진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내가 대학을 다녔던 1990년대 초반 캠퍼스엔 늘 김광석이 있었다. 잔디밭, 매점 앞 벤치, 학생회관의 동아리방 여기저기서 누군가의 통기타에 맞춰 ‘떼창’이 터져나왔다. 열아홉살, 스무살의 새내기들은 10년쯤 후 맞이할 ‘서른 즈음에’를 군가였던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에즈’처럼 힘차게 불러제꼈다. 군 입대를 앞둔 남자 동기들의 환송식 자리에선 어김없이 ‘이등병의 편지’가 불려졌다. 그가 방위든, 장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즈음 눈물이 흘러내리고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날의 꿈이여” 끝부분에선 엉엉 통곡하는 식이 됐다.
내가 보름 넘게 취재했던 ‘김훈 중위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김광석이었다.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 북한군 중사 송강호의 대사에 나도 모르게 스쳐지나가는 ‘김광석은 왜 그렇게 일찍 죽었을까’ 하는 생각…. 사망 몇 달 전인 1995년 8월 공연에서 “7년이 있으면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되는데, 마흔이 되면 할리 데이비슨(오토바이), 그거 사서 세계일주하고 싶다”던 김광석의 경쾌한 목소리도 떠올랐다.
영화 ‘김광석’ 감독 이상호 씨는 김광석과 딸 사망의 배후에 서 씨가 있다며 서 씨를 고발했다. 고발 기자회견에는 여당 4선인 안민석 의원이 ‘호위무사’처럼 배석했다. “서 씨가 강용석 변호사를 법률대리인으로 선임했다”는 이 씨의 말에 강 변호사의 수임 여부가 화제가 되는가 싶더니 강 변호사가 “서 씨 변호를 맡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입장을 밝히자 이번엔 그 이유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10년 전 서연 양 사망 때 병원의 진료 기록, 부검 결과 등을 종합해 ‘범죄 혐의점이 없다’고 결론 지었던 경찰은 즉각 재수사로 전환하고는 수사처도 일선 경찰서에서 서울지방경찰청 산하 광역수사대로 바꿨다. 광역수사대는 무술이 3단 이상인 정예요원들로 구성된 강력 수사대다. 의혹이 있다면 풀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조수진 논설위원 jin06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