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 경제 ‘희망 엔진’ 떠올라
아이크림은 눈 주변에만 바르는 것이라는 기존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다. AHC라는 브랜드로 2009년 이 제품을 내놓은 커버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은 4295억 원에 이른다. 2015년과 비교하면 약 175%(2730억 원)가 늘었다. 국내 화장품 시장에 돌풍을 일으킨 미샤 등의 1세대 브랜드가 주춤하는 사이에 새로운 원료와 콘셉트로 한국과 중국에서 돌풍을 일으킨 덕분이다.
국산화율 0%였던 차량용 인포테인먼트(정보 및 오락) 시장에 진출한 텔레칩스는 현재 현대·기아자동차의 차량용 오디오 플랫폼에 장착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의 약 80%를 공급한다. 지난해 매출은 1009억 원. 초기에 유·무선 전화기의 발신자 정보 표시를 위한 칩 제조로 시작한 이 회사가 비약적인 성장을 한 배경은 연구개발(R&D)에 막대한 투자를 한 결과다. 지난해 R&D 투자는 매출액 대비 36.1%(364억 원)에 이른다.
지난해 벤처천억기업은 전년(474개)보다 39개(8.2%) 증가한 513개로 최근 5년 사이 가장 많이 늘었다. 대기업 매출액이 2014년에 전년 대비 0.4%가 줄어든 이후 2015년과 2016년에도 각각 4.7%와 0.3%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중소·중견기업들은 꾸준히 성장한 셈이다.
안경 제조업체인 아이아이컴바인드는 아시아인의 둥근 골격에 맞춘 오버사이즈 선글라스인 이른바 ‘아시안핏’을 강조하는 스타일로 급성장했다.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그룹 계열 사모펀드(PEF)인 L캐터톤아시아로부터 600억 원을 투자받으면서 중국과 미국 뉴욕, 홍콩 등 해외시장에도 진출했다. 2011년에 창업한 이 회사는 2015년 572억 원의 매출을 올린 뒤 지난해에는 매출이 158%(1477억 원) 성장했다.
이 회사처럼 3년 연속 20% 이상 매출이 증가한 이른바 ‘슈퍼 가젤형 기업’은 2015년 18개에서 2016년 28개로 10개(55.6%)가 늘어났다. 가젤은 도약력이 뛰어난 아프리카의 동물로 통상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들을 의미한다. 지난해 새롭게 슈퍼 가젤형 기업이 된 곳은 아이아이컴바인드 외에도 반도체장비 업체인 제이스텍과 화장품과 화장품 용기(플라스틱, 유리) 제조업체인 씨티케이코스메틱스, 온라인 교육 및 교육콘텐츠 개발업체인 에스제이더블유인터내셔널 등이 있다. 중기부 측은 “지난해 벤처천억기업에 진입한 곳들은 반도체 장비업체 외에 새로운 소비패턴 변화에 맞춘 건강과 미용 등의 분야가 많다”고 설명했다.
벤처천억기업의 총매출은 2015년 101조 원에서 2016년 107조원으로 6% 증가했다. 전체 종사자 수는 2016년에 19만3490명으로 전년보다 8%(1만4318명)가 늘었다. 기업당 평균 종사자 수도 385.4명으로 전년보다 7.4명(1.9%)이 증가했다.
이번 조사에서 대기업에 의존하는 매출 비중이 50% 이상인 기업의 비중은 2010년 30.1%에서 2015년에는 23.1%로 감소했다. 반면 대기업 매출 의존도가 50% 미만인 기업은 같은 기간에 69.9%에서 76.9%로 늘었다. 2016년 벤처천억기업의 영업이익률은 8.1%, 부채비율은 80.2%로 대기업(6.1%, 85.9%)이나 중소기업(6.0%, 147.4%)보다 재무실적도 양호했다.
중기부 측은 “중소·중견기업들이 대기업 매출에 의존해 성장했던 과거의 성공 공식에서 벗어나 대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생태계로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