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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이응노가 이런 그림도…” 파리, 한국의 피카소를 다시 보다

입력 | 2017-09-26 03:00:00

세르뉘시 이어 퐁피두센터 직접 기획, 유족에 작품 17점 기증받아 전시회




20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5층 전시실에서 프랑스 관람객들이 고암 이응노 화백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오른쪽은 고암의 1980년대 대표작인 ‘군상’ 시리즈. 파리=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응노 선생님은 붓을 든 저희들의 손을 잡고 ‘콤사(Comme ¤a·이렇게)’라면서 친절하게 그림을 가르쳐줬어요. 고국 걱정을 많이 하더니 이런 그림도 그리셨군요.”

20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 5층 전시실. 백발의 프랑스인 제자들이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사진)의 1978년 작품 ‘구성’ 앞에 섰다. 그림 속 빨강 물결 속에는 ‘유신 타도’ 같은 글귀들이 써 있다. 이응노는 1958년 프랑스로 이주 후 1964년 파리 세르뉘시 미술관에 동양미술학교를 세워 3000여 명의 후학을 길러냈다. 동양화와 서양화, 전통과 현대의 결합을 시도해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기도 한 그는 간첩단 조작사건인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프랑스에서 망명객처럼 살다가 생을 마쳤다. 요즘 말로 치면 원조 ‘블랙리스트 작가’다.

그런 이응노를 프랑스 미술계가 다시 보기 시작했다.

올해 6월부터 11월 19일까지 세르뉘시 미술관에서 ‘군상(群像)의 남자, 이응노’ 전시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세계적 권위의 퐁피두센터가 20일 이 화백의 유족들로부터 17점의 작품을 기증받아 ‘이응노’ 전시에 나섰다. 퐁피두센터가 직접 기획한 이례적인 전시다.

20일 오후 6시 열린 전시 개막식에는 이응노의 부인 박인경 화백(91)과 아들 이융세 화백(61)을 비롯해 베르나르 블리스텐 퐁피두센터 관장, 에리크 르페브르 세르뉘시 미술관장, 프랑크 고트로 디종 현대미술관 설립자 등 프랑스 미술계의 주요 인사가 대거 참석했다. 블리스텐 퐁피두센터 관장은 “왜 퐁피두가 이응노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한국 미술, 특히 이응노는 동양과 서양 문화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며 “이응노는 모더니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주기 때문에 미술사적 의미가 재평가돼야 한다”고 답했다. 프랑스 관람객들은 “동양화 같은데도 프랑스 추상화 느낌이 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 계기는 2년 전 디종 현대미술관이 연 이응노 전시였다. 블리스텐 관장은 이응노의 작품을 이때 처음 보고 푹 빠져들었다. 이후 파리 근교에 사는 이응노 유족을 찾아가 직접 전시할 작품을 추렸다. 박 화백은 “아무나 기증한다고 받아주지 않는 퐁피두센터가 기증을 받아줘 꿈을 꾸듯 기뻤다”고 말했다.

11월 27일까지 단독 전시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1950년대 수묵 산수화, 1960년대 한지 콜라주, 1970년대 문자 추상, 1980년대 5·18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받은 군상 등 이응노의 작품들이 연대기로 펼쳐진다. 특히 한지에 먹으로 수천 명까지 그린 군상 시리즈는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이 전시가 끝나면 작품들은 퐁피두센터의 다른 작품들과 섞여 걸리게 된다.

이 전시엔 숨은 공신도 있다.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은 대전의 이응노미술관이다. 우선 이응노 관련 자료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만들어 국제전시를 가능케 하는 기초자료를 구축했다. 또 여러 전시를 통해 이응노를 독일의 한스 아르퉁(1904∼1989)과 중국의 자오우지(1920∼2013) 등 앵포르멜(제2차 세계대전 후 표현주의적 추상예술) 작가 군으로 편입시켰다. 이응노미술관의 이지호 관장은 “한국의 작가들이 세계적 지명도를 갖추려면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미술관 전시 경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세르뉘시 미술관은 21일부터 유족인 박인경 이융세 화백의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 박 화백의 풍경 수묵화, 이 화백의 한지 추상화에 이응노의 화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응노가 파리에서 찬란하게 부활하고 있다.

파리=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