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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신석호]다시 통일을 이야기합시다

입력 | 2017-09-30 03:00:00


신석호 국제부장

국내 환경학계 원로인 서울대 김귀곤 명예교수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2011년 12월 1일 채널A 개국을 앞두고 자신이 진두지휘하던 동해선 철도 복원사업 구간 환경영향평가 현장을 영상에 담을 수 있도록 도와준 분이다. 거의 6년 만인 노학자의 목소리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곧 두루미가 한반도를 찾아올 텐데 경원선 복원사업이 재개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김 교수 팀은 동해선 사업의 노하우를 살려 경원선 환경영향평가 과제도 맡아 진행했다. 하지만 철도 복원 사업은 지난해 여름부터, 환경평가사업은 겨울부터 예산 지원이 끊어졌다고 한다. 지난해 2월 개성공단 중단으로 피해 기업들에 대한 지원 부담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어디 그 사업뿐인가. 정권 교체기의 혼란과 북한의 핵 폭주 속에서 우리 내부의 통일 논의는 삼각파도에 휩쓸려 조난 직전이다. 정부와 민간을 막론하고 올 스톱 상태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의 과오가 크다. 아직도 누구 작품인지가 불명확한 ‘통일 대박론’은 통일로 가는 지난한 과정과 그에 수반되는 비용과 위험은 생략한 채 환상적인 통일의 비전만 내세웠다. 최순실 국정 농단과 초유의 탄핵 사태로 영어의 몸이 된 박 전 대통령은 헌법이 규정한 신성한 통일의 가치마저 감금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마땅하다.

지난해 1월 6일 4차 핵실험으로 시작된 김정은의 핵 폭주가 2년째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에는 통일에 대한 비관론이 확산되고 있다. 북한학자 홍민은 지난해 말 저서에서 “통일 논의에 핵무기라는 물리적·정치적 장치가 들어서게 됨에 따라 사실상 통일이 핵 문제에 묻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은 남한 주도의 흡수통일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제도 통일을 막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핵·미사일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탄핵 정국에서 출발한 문재인 정부도 통일 논의에 인색하다. 북한과의 대화가 더 중요하고 국정 비전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와 번영인 것 같다. 한 당국자는 “우리가 통일! 통일! 하면 북한은 독일식 흡수통일을 떠올려 대화를 주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북이 대화해 평화를 이루고 번영을 추구하는 과정에 통일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설명이다. 28일 민주평통 간부 및 자문위원 초청 간담회에 참석한 문 대통령도 “남북 관계가 어렵더라도 민주평통이 추진하는 다양한 통일 사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면서도 “지금은 비록 상황이 쉽지 않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평화통일”을 말하면서도 그 통일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는 헌법 4조는 언급하지 않았다.

최근 한 북한학계 원로 인사는 “대통령이 왜 입버릇처럼 ‘북한을 흡수통일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야 기회가 왔을 때 미국과 중국이 한국의 통일 의지를 믿고 밀어주겠느냐”고 했다. 이어 “대한민국은 분단국이고 대통령에게 헌법이 명령한 최대의 임무는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이라고 강조했다.

핵을 들고 적화통일을 꿈꾸는 김정은 앞에서 통일이라는 비전을 외면하는 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배가 자동항법장치도 없이 표류하는 것과 같다. 비록 항구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등대는 보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신석호 국제부장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