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 철학자
아르고스는 수천 년 동안 충견의 상징이었습니다. 서양에서 개는 ‘사람에게 최고의 친구(Man‘s best friend)’라는 말을 낳게 한 이른바 반려견(伴侶犬)의 원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반려동물, 특히 반려견 때문에 생기는 사회적 갈등이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도 그 때문에 다툼이 생긴 이웃을 보았습니다. 아파트 주위의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70세쯤 되어 보이는 부인과 하얗고 예쁜 강아지를 데리고 있는 20대 여성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산책 중 강아지가 갑자기 짖는 바람에 부인이 너무 놀라 심장까지 벌렁댔다는 겁니다. “개 교육 좀 잘 시키라!”에 “목줄까지 했는데 뭐가 잘못이냐!”라는 대꾸까지 오가며 상황이 좀 험악해진 듯했습니다.
반려동물 전문가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반려견 400만 마리, 반려인 1000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반려견이라는 말이 애완견이라는 말을 몰아내고 인생을 함께하는 개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애완동물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애완에서 반려로 시민들의 의식이 빠르게 발전해 온 거지요.
애완에서 반려로의 의식 이동은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의식에 행동이 따라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애완(愛玩)이란 말에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아끼고 사랑하며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반려는 ‘함께하는 동무’라는 뜻입니다. 애완이 일방적이라면 반려는 상호적입니다.
사람과 애완동물의 관계는 사적 관리의 차원에 있지만, 그 관계가 반려동물의 차원으로 가면 공적 책임이 부상합니다. 애완은 소유의 개념에 근거하지만 반려는 보호의 개념에 근거합니다. 사람은 애완견의 주인(owner)이지만 반려견의 보호자(guardian)입니다. 애완은 개인적이지만 반려는 공동체적입니다.
이제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의 핵심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동물이 한 개인의 소유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애완동물은 주인의 펫(pet)에 머물지만, 반려동물은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의 반려(companion)일 뿐 아니라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려 또는 동무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김용석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