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13> 13화: 명량에서 건진 조선의 운명
이순신의 수군이 명량해전에 출전하기 직전까지 머물던 진도 벽파진의 벽파정. 경치가 좋아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명소이기도 하다. 진도=박영철 기자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1597년 9월 16일의 명량대첩을 앞두고 이순신은 며칠 간격으로 꿈을 꾸었다. 그 스스로도 ‘이상한 징조’라고 해석했다.
“공(이순신)은 ‘백발노인(白頭翁)이 발로 차면서 일어나라! 일어나! 적이 왔다’는 꿈을 꾼 뒤, 곧바로 장수를 거느리고 노량 해상에 이르니 적이 과연 와 있었다.”(이분의 ‘충무공행록’)
이순신은 전쟁 와중에 계시적 꿈을 자주 꾸었다. 그가 꿈을 꾸고 나면 현실에서 유사하게 일이 전개됐다. 이순신은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1597년 7월 16일)하기 열흘 전, 원균의 몰락을 미리 꿈으로 감지했다.
“오늘은 칠석이다. 꿈에 원공(원균)과 함께 모였는데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밥을 내올 때 원균이 즐거운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난중일기’ 1597년 7월 7일)
당시는 이순신이 아무 직책 없이 백의종군할 때고,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조선수군을 지휘할 때였다. 그런데 이순신이 원균보다 윗자리에 앉아 있는 꿈은 곧 상황이 뒤바뀔 것이며, 경쟁과 갈등 관계가 종료됨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순신은 이 꿈을 꾼 뒤, 더 이상 원균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지 않았다.
가자! 울돌목으로
올해 정유재란 7주갑(420년)을 맞아 9월 9일 울돌목에서 열린 명량해전 재현 행사(2017년 명량대첩축제). 이순신이 지휘한 거북선 모양의 대장선(가운데)이 겹겹이 에워싼 일본 수군의 세키부네(왼쪽 아래)와 치열하게 싸우는 상황을 현지 어선들이 재현했다. 진도·해남=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이순신은 바로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으로 진을 옮기고 결전을 대비했다. 이윽고 9월 16일 이른 아침 별망군(別望軍)이 보고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들이 명량(울돌목)을 거쳐 곧장 진을 치고 있는 곳(전라우수영)으로 향해 오고 있습니다.”(‘난중일기’)
울돌목은 건곤일척의 승부처였다. 왜군이 이곳을 장악하면 바로 서해바다를 접수해 곧장 북으로 내달려 경강(京江·한강)까지 진격할 수 있다. 또 서해를 통한 호남의 병참기지까지 확보함으로써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함은 물론이고 내륙 각지의 일본 좌군과 우군들에게 식량과 무기 등을 원활히 보급할 수 있다.
반면 이곳을 조선수군이 지키면 왜군은 후방 보급로가 차단돼 더 이상 북상하기가 어렵다. 후방 교두보가 불안해지면 왜군은 육지전에서 수세(守勢)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출전을 명령한 뒤 상선(上船·대장선)에 올라 명량해협으로 나갔다. 이순신의 수군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정탐선) 32척이 전부였다.
반면 왜군은 주력 전함인 세키부네 130여 척이 전면으로 나선 가운데 그 뒤로는 대형 전선인 아타케부네(安宅船) 70여 척을 포함해 200여 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왜군 2만 명이 명량해협을 가득 메운 어마어마한 수였다. 칠천량 해전에서 공을 세워 히데요시로부터 포상을 받은 도도 다카도라가 수군 총대장을 맡고 있었다. 일본에서 ‘해적왕’으로 유명한 구루시마 미치후사(조선에서는 ‘마다시’라고 불렀음)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에게 목숨을 잃은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순신을 죽이겠다며 선봉을 자처했다.
조선의 판옥선 지휘관들은 압도적인 규모의 왜선들을 보자 겁부터 집어먹었다. 이순신은 이런 상황을 예상해 출전 전 여러 장수들에게 엄중하게 다짐을 받아두었던 터였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다. 또 ‘한 명의 장부가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즉시 군율을 적용해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난중일기’)
그러나 왜선들이 조류가 자신들에게 유리해진 틈을 타 쏜살같이 진격해오자, 이순신이 탄 상선을 제외한 나머지 12척은 바라만 보고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배만 홀로 거센 조류를 맞으면서 적선 가운데로 돌진했다. 판옥선의 막강 화포인 지자(地字)와 현자(玄字) 총통 등을 이리저리 발사했다. 뱃전의 군관들은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댔다. 적선들은 화포와 화살을 피해 물러났다 다가왔다를 반복했고 결국 이순신의 상선은 적선에게 겹겹이 포위되고 말았다. 군사들은 겁에 질려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순신이 타일렀다.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를 곧바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라.”(‘난중일기’)
이순신은 뿔피리를 불어 통제사의 명을 받드는 중군 판옥선을 향해 영하기(令下旗)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다. 그러자 군령을 받은 중군장 김응함의 배가 점차 이순신의 상선 가까이 다가왔고, 거제현령 안위의 판옥선도 왔다. 이순신은 뱃전에 서서 먼저 도착한 안위를 불렀다.
“안위야! 네가 억지 부리다 감히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간들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난중일기’)
실제로 그랬다. 통제사의 군령을 따르지 않은 장수들은 전투 후 책임을 물어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자 안위와 김응함은 황급히 적선으로 치고 들어갔다.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세키부네가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그 휘하의 해적 출신 수군들이었다. 이들은 배에 올라타서 싸우는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에는 이골이 난 싸움꾼들이었다.
조선 민간인도 해전에 동참
울돌목 해협. 사진속 진도대교 위쪽이 해남, 아래쪽이 진도다. 진도·해남=박영철 기자
바다가 바라보이는 육지 쪽에서는 조선수군을 응원하는 백성들의 함성이 넘쳐났다. 이처럼 민간인들이 위장전술과 지원활동을 아끼지 않았고, 이순신과 조선수군에게는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마침내 안위의 배에 달라붙었던 적선 3척이 섬멸됐다. 조선군의 집중 사격으로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이순신은 적장을 건져내 그 머리를 베어 상선의 깃대에 매달도록 했다. 이 광경을 본 나머지 판옥선들도 전투에 뛰어들었다. 이순신의 함대를 에워쌌던 적선들이 차례로 격파됐다. 이때 왜군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 역시 팔 두 군데를 부상당했다. 왜선들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새벽 묘시(오전 5∼7시)부터 시작한 전투는 신시(오후 3∼5시)에 끝났다. 모두 3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하고 4000명의 왜군을 사살한 대승이었다. 판옥선은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실로 천행(天幸)이로다.”
명량해협의 전투가 끝나자 이순신이 내뱉은 말이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전투를 멈추었다. 바람이 다시 아군에 불리한 역풍으로 불고, 왜선이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쳐들어올 경우 수적으로 열세인 수군이 위험해진다는 점을 들어 더 이상의 공격을 멈춘 것이다.
이순신에게 차가운 선조
이순신의 리더십 아래 민관군이 합심해 이룬 명량해전의 대승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는 전환점이었다. 그해 2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재침을 명령한 이래 왜군이 일방적으로 조선 땅을 유린하던 상황에서 거둔 첫 승전이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한 수군을 단 2개월 만에 재건해 거둔 세계 전사(戰史)에 남을 대승이었다. 이 승리는 전투 의지를 잃고 내빼기 바빴던 육지의 조선군들에게도 다시 싸울 용기를 주었다. 각지의 의병들도 왜군들과 본격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호남에서는 이순신 수군과 연대한 의병들이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펼쳤다. 남의 동네 불구경하듯 멈칫거리던 명나라 군대도 더 이상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기울던 전세가 이순신 덕분에 역전된 것이다.
조선군에 대해 인색한 평가를 내리던 명나라 장군도 이순신이 왜적을 많이 포획했다며 공적을 높이 샀다. 사실 중국은 서해를 통한 왜군의 중국 본토 공격을 차단해준 이순신에게 고맙다고 머리를 숙여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정작 선조의 반응은 차가웠다. 자신의 수군철폐령을 거부한 것이 괘씸해서인지, 선조는 이순신이 명량대첩 승전을 보고하는 장계를 올렸을 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명나라 경리 양호가 개인적으로 이순신에게 은자(銀子)와 비단을 상으로 주자, 선조는 양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 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선조실록’)
선조는 명량대첩이 끝난 지 두 달이 지난 후에야 이순신에게 겨우 은자 20냥을 주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渡海) 정보를 흘린 이중첩자 요시라에게는 정3품 당상관 벼슬에다 은자 80냥을 통 크게 준 선조였다.
진도·해남=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14화는 10월 8일 자(일요일)에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