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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짜고짜 “채팅녀 아니냐”… 밤길 누비는 공포의 늑대들

입력 | 2017-09-30 03:00:00

여성들 강력범죄 전단계 ‘노란불 범죄’에 불안 호소
한밤 버스부터 쫓아오며 “대화하자”… 1시간 넘도록 떨게 만들어도 경찰에 신고하면 “적용혐의 없다”
보호받을 수단 없어 더 불안… “공권력의 적절한 개입장치 필요”




22일 오후 10시 40분 광주 북구 번화가의 한 카페 2층. 윤모 씨(23·여)는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 남성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중년의 등산복 차림이었다. “‘○○’에서 채팅했던 사람입니다.”

남성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은(는) 주로 조건만남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스마트폰 채팅 애플리케이션(앱)이다. 윤 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주민등록증까지 꺼내 보이며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년 남성은 막무가내였다. 뒤이어 나타난 한 젊은 남성도 윤 씨를 향해 다가왔다.

두려워진 윤 씨는 다급히 가방을 챙겨 자리를 떴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왜 그러느냐”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섰는데 중년 남성이 따라 나왔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윤 씨는 지인을 만났다. 남성은 사라졌다.

윤 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성희롱도 아니고, 단순히 물어본 것만으로는 적용할 만한 혐의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윤 씨는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가 해코지할까 봐 겁이 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주변을 살펴보면 윤 씨처럼 범죄 피해의 경계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벗어난 경우가 많다. 범죄의 ‘빨간불’이 켜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피해를 모면한 것이다. 대부분 여성이다. 일단 범죄를 피해도 상당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강력범죄 직전의 단계, 즉 ‘노란불 범죄’의 피해자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노란불 범죄는 가해자를 제재할 법적 수단이 없다.

서울 동작구에서 자취하는 제모 씨(23·여)는 버스에 오를 때마다 악몽이 떠오른다. 몇 달 전 밤늦게 정류장으로 향하던 제 씨의 뒤를 한 40대 남성이 말을 걸며 따라왔다. 제 씨가 도망치듯 버스에 오르자 남성도 뒤따랐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제 씨가 내리자 남성도 따라 내렸다. 제 씨의 문자메시지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다. 이 남성은 동작구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수상했지만 경찰도 별 도리가 없었다. 결국 경찰은 제 씨에게 “신고해 봐야 신변만 노출되니 그냥 집에 가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하게 돼 더 무서워졌다”고 말했다.

최근 노란불 범죄가 실제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7월 서울 강남의 한 미용업소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피해자(30·여)는 인터넷방송에 노출된 뒤 “이상한 연락이나 이상한 손님이 자주 온다”며 주변에 불안감을 호소했다. 올 1월 강남의 한 빌라에서 전 여자친구를 때려 숨지게 한 남성도 사건 3시간 전 피해자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다 경찰에 연행됐지만 이내 풀려난 뒤 범행했다.

29일 경찰청이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경찰이 비출동으로 분류한 112 신고 중 강력범죄로 접수된 경우가 2만340건에 달했다. 성폭력은 377건, 살인과 강도는 각각 72건, 58건이었다. 경찰이 지난해 6월 여성을 대상으로 ‘불안요소 신고’를 받은 결과 전체 3629건 중 30.2%(1097건)가 ‘특정인 또는 불특정인에 대한 불안’ 신고였다.

강력범죄의 조짐이 있어도 미리 막기가 쉽지 않다. 개인 관련 범죄 중 예비나 음모죄가 인정되는 건 강도 살인 등 일부에 그친다. 성범죄의 경우 강도강간죄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정되지 않는다. 경범죄처벌법상 ‘불안감 조성’을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과태료 5만 원에 불과하다. 곽대경 동국대 교수(경찰행정학)는 “잠재적 가해자가 직접적 위해를 가하기 전에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고 억제할 수 있는 적절한 (공권력) 개입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기범 kaki@donga.com·최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