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카이로 외곽 메나하우스 호텔에 세워져 있는 카이로 선언(1943년) 기념비.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한국에서 오셨죠? 호텔 정문 옆 언덕 위 정원에 기념비가 있으니 가서 꼭 확인해 보세요.”
메나하우스 호텔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의 본부였다.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 중국 총통 등 3개국 정상이 이곳에서 이른바 ‘카이로 선언’에 합의했다. 이들은 전후 처리 문제와 함께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자유 독립을 처음으로 약속했다. 카이로 선언의 내용은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주이집트 한국대사관은 이러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2015년 10월 1일 카이로 선언 기념비를 설치했다.
그러나 불과 3년 뒤 이 같은 합의는 번복된다. 독립전쟁을 통해 강대국으로 부상한 터키와 연합국이 새로 체결한 로잔 조약에 쿠르드의 독립 조항은 아예 삭제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국경선을 그어 나눠 먹은 중동 지역에 풍부한 유전을 보유한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중동 고원과 산악지역)이 독립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 결과 쿠르드 지역은 터키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르메니아 영토의 일부로 강제 귀속됐다. 쿠르드족이 “100년 이상 독립투표를 기다려 왔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브르 조약 이후 10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쿠르드는 주권 없는 민족으로 남아 있다. 쿠르드 민족은 주권국가, 특히 강대국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쿠르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분리 독립을 약속받고 영국의 동맹군으로 참전했지만 세브르 조약은 휴지조각이 됐다. 5개 지역으로 쪼개진 쿠르드에 돌아온 것은 탄압과 대규모 학살이었다.
쿠르드는 1920년대 무장투쟁을 전개했지만 이라크와 요르단 지역을 점령한 영국은 쿠르드인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처칠은 “벌레 같고 하찮다”며 독가스를 사용해 쿠르드인을 말살시키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당시 영국군은 독가스가 부족해 실제 독가스 학살이 자행되지 않았지만 쿠르드인 수만 명이 죽었다.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독가스를 사용해 약 18만 명의 쿠르드인을 학살했다. 쿠르드가 이란을 도왔다는 이유로 인종청소에 가까운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당시 영국 언론이 이를 비난하자 후세인은 “처칠에게 배운 것일 뿐”이라며 비웃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쿠르드는 지난 3년간 이라크 정부군을 대신해 북부 키르쿠크주와 니네베주를 이슬람국가(IS)의 손아귀에서 지켜냈다. 쿠르드는 IS 격퇴전으로 높아진 위상과 명분을 내세워 독립을 협상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지난달 25일 분리·독립 주민주표를 강행했다. 투표 결과 92.73%가 찬성표를 던졌지만 이라크 중앙정부와 미국 등 국제사회의 강력한 반대로 독립은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쿠르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한민족의 독립은 어쩌면 커다란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대국들이 카이로 선언에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라는 조건부 표현을 넣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반도가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더라도 곧바로 자주 독립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구상했던 신탁통치안은 결과적으로 광복 이후 한반도를 둘로 쪼개 놓았다.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에서 주권국가를 차리지 못한 민족은 물속을 부유하는 플랑크톤 신세일 뿐이다.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min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