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이란 핵 협상 회의에 참석한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고위대표(왼쪽)와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 EU 집행위원회 제공
이세형 국제부 기자
올해 노벨 평화상을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에 내줬지만 자리프와 모게리니는 막판까지 유력 수상 후보로 거론됐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공직을 떠난 케리와 달리 현직에 있는 자리프와 모게리니는 앞으로 계속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이란 핵 합의 파기 방침이 확고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질 것이란 전망과 외신 보도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란 핵 합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모게리니는 지난달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핵 합의 파기 의사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당시 그는 “핵 합의가 제 역할을 하고 있고, 재협상은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모게리니는 2015년 이란 핵 협상 막판에 이란과 서방 측의 입장 차이를 적절히 좁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훌륭한 중재자’란 평가를 받았다.
자리프는 6일(현지 시간)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국제적 합의는 부동산 협상보다 더 복잡하다. 재미나 취미로 부동산 거래를 할 수 있지만, 국제적 합의는 재미로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성향과 배경이 공직자로는 부적합하고, 핵 합의 파기 방침은 잘못됐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란을 ‘불량 국가(rogue state)’로 표현한 트럼프의 유엔총회 연설(지난달 19일) 뒤에도 “트럼프의 무지한 혐오 발언은 21세기 유엔이 아닌 중세 시대에나 어울리는 발언이다”라고 지적해 트럼프의 격을 떨어뜨리는 반격을 가했다.
자리프는 핵 협상뿐 아니라 다른 중동 이슈에서도 전략적이며 동시에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6월 초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아랍에미리트(UAE) 등 아랍 국가들이 주도한 ‘카타르 단교 사태’ 때 카타르를 적극 도우면서도 이란에 적대적인 단교 선언 국가들을 자극하지 않았다. 사태 직후 “이웃은 영원하고, 지리는 바꿀 수 없다”라는 그의 발언은 이란이 카타르를 돕는 것의 정당성과 사태 해결의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수준 높은 외교적 수사로 평가받았다.
자리프는 미국의 협상 파트너로 괜찮은 배경을 갖췄다. 학부(샌프란시스코주립대)와 박사과정(덴버대)을 모두 미국에서 마쳤다. 영어에 능숙하고,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다. 유엔 주재 이란 대사를 5년간 지내 국제정세나 글로벌 스탠더드를 제대로 이해한다. 성향도 과격·보수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중동 전문가 중에는 최근 자리프를 걱정하는 이들도 많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핵 합의 파기가 결정되고, 이란 봉쇄 정책이 거세질 경우 자리프와 그의 ‘보스’인 하산 로하니 대통령같이 비교적 온건한 중도 성향을 가진 세력들이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로하니와 자리프 체제에서 이뤄진 변화를 반대하는 강경파의 입김이 세지는 건 트럼프가 원하는 이란의 모습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지난달 말 한국중동학회가 연 ‘불확실 시대, 중동의 화합과 번영의 길 모색’ 국제학술대회에서도 “로하니와 자리프 체제가 미국에 긍정적이다”, “트럼프가 이미 변화가 시작된 이란을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라는 의견이 많았다.
한편으로는 북핵과 미사일 문제를 다루는 한국 측 고위관계자에게서 자리프를 연상시키는 외교적 발언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반도 긴장이 커질 때 우리의 상황과 지향점을 세련되고, 분명한 외교 수사로 국제사회에 전달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커질 것이다.
이세형 국제부 기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