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 백제 왕도인 풍납-몽촌토성과 인접… 목간 발굴 전 백제 성곽설에 무게 이성산성 저수지에서 나온 목간… 해서체 달필로 쓴 무진년 간지 남한성 지명-도사 관직 적혀있어… 축성시기와 주체 알 수 있는 증거
지난달 25일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 동문 터에서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이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안쪽에 놓인 사각형의 커다란 돌 2개는 기둥을 고정시키는 문지공석으로 신라 때 만들어졌다. 하남=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구루(Guru)’의 말은 짧고 단정적이지만 그 속에 힘이 있다. 단순한 교과서 지식이 아니라 수십 년 세월 자신이 경험한 산지식이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二聖山城) 동문(東門) 터. 멀리 한강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구릉 가장자리로 6m 너비의 바닥과 벽면을 감싼 석축이 보였다. 동행한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56)이 안쪽 바닥 면에 솟아있는 두 개의 문지공석(門址孔石·기둥이 무너지지 않게 고정시키는 돌)을 조용히 가리켰다. 사각형의 큼지막한 돌에 원형의 구멍이 이중으로 파여 있다. 1500년 전 이 돌에 고정된 커다란 나무문을 신라 병사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켰을 것이다. 그는 “이런 모양의 돌구멍은 전형적인 신라 석성에서나 볼 수 있다”며 “산성 쌓기는 건축과 토목 기술이 융합된 당대의 원천기술로 축성 방식을 들여다보면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1990년 7월 이성산성 내 1차 저수지에서 출토된 목간. ‘무진년’ 간지와 함께 신라 관직명인 ‘도사’가 적혀 있다. 한양대박물관 제공
소리를 듣고 뛰어온 당시 한양대박물관 책임조사원 심광주가 숨죽인 채 목간 글씨를 하나씩 확인했다. 해서체 달필로 쓴 간지(干支·연대)와 관직명이 뚜렷하게 보였다. 심광주의 회고. “3년 내내 학수고대하던 명문 자료를 처음 출토한 순간이었습니다. 산성 축성 시기와 주체를 파악할 수 있는 강력한 증거를 얻은 겁니다.”
목간에는 무진년(戊辰年) 간지와 남한성(南漢城) 지명, 도사(道使) 관직이 한꺼번에 적혀 있었다. 저수지에서 고구려나 백제 유물은 없었고 신라 것만 나온 걸 감안하면 무진년은 신라가 한강 일대에 진출한 이후인 608, 668, 728, 788년 중 하나라는 게 그의 견해다. 특히 도사는 신라 관직명으로 6, 7세기 자료에 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함께 출토된 토기 양식을 고려하면 608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라 진흥왕이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은 지 5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삼국통일로 나가는 길목에 있던 신라는 아마도 남한강을 지척에 둔 이성산성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목간의 출토 위치도 매우 중요했다. 1차 저수지는 지층상 성벽을 처음 쌓을 때 함께 조성된 사실이 확인됐는데, 목간은 저수지 바닥에서 불과 1m 높이에서 발견됐다. 이는 목간이 가리키는 연대가 이성산성이 축조된 시기와 근접해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근거였다.
○ “삼국 중 누가 쌓았나” 논란
그러나 유물과 유적이 가리키는 결론은 명확하다는 게 심광주의 견해다. 토성(土城) 중심의 백제 산성과 달리 전형적인 석성(石城)이고, 수직으로 쌓아올린 성벽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삼각형 단면의 석축을 성벽 하단에 덧대 쌓는 보축(補築)이 발견된 것도 이성산성이 신라 산성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30년을 발굴했는데도 백제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아요. 신념처럼 믿는 것과 명확한 고고학 증거가 서로 다를 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성산성 발굴은 성곽을 볼 때 위치나 역사적인 배경보다 기술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제게 줬습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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