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 동아일보DB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입니다. 갇힌 성 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임금이 주먹으로 서안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어허, 그만들 하라. 그만들 해.
-김훈 소설 ‘남한산성’ 중에서
1636년 겨울,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왕이 응당 있어야 할 궁이 아니었다. 청의 10만 대군이 조선으로 진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려 했지만 청군이 길을 끊어 남한산성에 몸을 두어야 했다.
소설은 막바지, 삼전도의 굴욕을 묘사한 ‘조선 왕은 이마로 땋을 찧었다’는 문장은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득한 날들이 흔들렸다’는 문장과 나란히 놓인다. ‘흙냄새’란 치욕과 등가이지만, 살아있기에 가능한 체험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의 기록이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때껏 유일한 가치관이었던 ‘명분’과 차마 말을 꺼내지도 못했던 ‘실리’가 같은 무게로 맞서서다.
최근 개봉해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동아일보DB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