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승현 산업부 기자
11일 오후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의 빈소 모습이었다. 재계 최고령 창업주였던 그는 9일 별세했다. 정 명예회장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온 이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70년 가까운 이웃, 친구의 아들처럼 개인적 친분을 가진 조문객이 많았다.
‘운송직원 일동’이라는 화환이 특히 눈에 띄었다. 정 명예회장과 일면식도 없는 제품 운송기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했다. 전국 곳곳에서 정식품 대리점주들도 한걸음에 달려왔다. 회사 측은 대리점주들이 한꺼번에 오면 빈소가 너무 복잡해질까 무리해서 오지 말라는 공지까지 해야 했다. 정 명예회장을 평소 존경했다는 20대 대학생은 그의 별세 소식에 청바지 차림으로 빈소를 찾아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 명예회장과 아무런 연(緣)이 없는 ‘보통사람들’의 추모 전화도 계속 걸려왔다.
소아과 의사로 부족할 게 없었던 정 명예회장은 1960년 주변 만류를 뿌리치며 유학길에 올랐다.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였고 슬하에는 6남매까지 있었다. 그는 갓 의사 가운을 걸친 스무 살 초년병 시절 살려내지 못한 한 아이를 늘 기억했다. 복통을 호소하며 엄마 등에 업혀온 아이가 목숨을 잃자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 그의 유학 결정은 소화불량 때문에 아이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는데도 도움이 돼 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도서관에서 그는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이란 병을 처음 접했다.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병이 우유나 모유를 분해하지 못해 생겼다는 걸 알게 됐다. 귀국한 뒤 국내 최초의 두유인 ‘베지밀’을 만든 배경이다. 유당이 없는 두유로 우유를 대신해 아이들이 황망한 이유로 죽어가는 걸 막겠다는 뜻이었다.
56세에 정식품을 창업했지만 돈벌이에는 관심이 없었다. 유당불내증 아이들을 위한 제품 개발에만 매달린 그에게는 ‘학자’라는 직함이 더 어울렸다. 경영 일선이 아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품 개발에만 몰두하다 보니 정재계 인맥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고인은 1986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이 됐다. 그 후로도 제품에 대한 고민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고령으로 휠체어에 의지하면서도 손수 현장을 챙겼다. 백발 창업주의 솔선수범은 그렇게 직원들에게, 대리점주들에게, 또 운송기사에게까지 감동을 준 셈이다.
문득 고인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했다. 생(生)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보단 편안함과 뿌듯함이 함께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지나치게 평범해 더 특별했던 그의 장례식은 후배 기업인들에게 참 많은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강승현 산업부 기자 byhu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