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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고미석]미국과 유네스코, 불편한 관계

입력 | 2017-10-14 03:00:00


유네스코 헌장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된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평화를 지키는 것도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인류공영과 세계평화를 목표로 설립된 유네스코가 21세기 첨예한 외교 전쟁터가 됐다.

▷유네스코 하면 대부분 세계유산을 떠올린다. 바로 이 세계유산을 둘러싼 문제로 조직이 휘청거리고 있다. 2015년 7월 일본은 강제징용 조선인들을 동원해 해저 석탄을 캐냈던 군함도가 근대 산업혁명 유산이라며 한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화유산에 등재시켰다. 유네스코는 “강제노역을 인정하라”는 권고를 붙였으나 일본은 이행하지 않고 있다. 유네스코에 두 번째로 많은 분담금을 낸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분담금을 무기로 휘두르는 일본이다. 2년 전 중국 난징대학살의 기록유산 등재에 반발해 분담금을 보류하더니 올해도 지급을 미뤘다.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등재를 막으려는 의도일 것이다.

▷일본보다 두 배 이상의 돈을 내는 최대 후원국 미국은 내년 말 유네스코를 탈퇴한다고 12일 공식 발표했다. 1984년 ‘소련 편향’과 방만한 운영을 이유로 탈퇴했다 2002년 복귀했으니 두 번째 탈퇴다. 이번의 탈퇴 이유는 유네스코가 7월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의 성지를 이스라엘이 아닌 팔레스타인 유산으로 등재하는 등 ‘반(反)이스라엘 성향’을 드러냈다는 것. 이스라엘도 뒤이어 탈퇴를 선언했다. 유네스코 측은 “유엔이라는 가족과 다자주의에 손실”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은 유네스코 창립을 주도했으나 뿌리 깊은 불만을 갖고 있다. 37개국이 참여했던 창립 당시와 달리 갈수록 자국의 영향력이 줄어든 탓이다. 유네스코 예산의 5분의 1을 부담하면서도 발언권은 되레 약화됐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도 한몫 거들었다. 어쨌거나 인류 보편적 가치를 논의하는 다자외교의 무대에서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 막중한 위상과 책임을 팽개치는 일이 잦아졌다. 국제사회의 리더로서 오랜 시간 쌓아온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