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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김갑식]문 대통령, 지혜의 정원을 가꿔라

입력 | 2017-10-17 03:00:00


김갑식 문화부장

조금 뒤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 집의 추석 밥상머리 화두는 고구마였다. 정치며 집안 살림살이며 건강, 교육 문제는 뒷전이었다.

요즘 인터넷에서 고구마는 불협화음으로 꼬이는 상황을, 반대로 사이다는 시원하게 풀릴 때를 의미한다고 한다. 인터넷 고구마가 아닌 실제 고구마가 화두가 된 것은 집 앞 공터에 있는 어머니의 텃밭 때문이었다. 채소와 고구마, 감자 등을 심는 그 밭은 노모의 소일거리이자 선물 주머니였다. 최근 급격하게 허리와 무릎이 나빠진 어머니는 내심 예닐곱 이랑 심은 고구마를 캘 적임자로 추석에 오는 아들 손자를 꼽은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무릎이 좋지 않은 아들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오자마자 웬 고구마를 캐냐.” 고구마성 발언이 나오자 불편한 얘기가 오갔다. 결국 추석 당일 꼭두새벽부터 호미를 들고 나가는 것으로 상황은 수습됐지만 1시간 반 동안 두 이랑 캐는 데 그쳤다. 이곳저곳 늘어진 줄기를 걷고, 호미로 고구마에 상처 내지 않고 캐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해 전보다 더 굽은 노모의 허리를 보며 “고구마 먹지도 않는다. 텃밭 일 그만두라”고 구시렁거렸지만 텃밭의 최대 수혜자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오경아 씨의 책 ‘정원생활자’ 중에는 ‘옥수수, 콩, 호박의 세 자매 이야기’란 대목이 나온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 발행하는 1달러 동전의 뒷면에는 미국 원주민 여인과 함께 옥수수, 호박, 덩굴성 콩, 이렇게 세 종류의 작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작물은 미국에서는 흔히 ‘스리 시스터스’, 세 자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식물들이지요. … 혼자가 아니라 셋이 함께 심겨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식물입니다.”

문외한의 눈에 세 자매의 사연은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자연의 과학이다. 키가 큰 옥수수는 콩과 호박의 지지대가 되면서 비바람을 막아주고, 콩은 공기 중 질소를 빨아들인 뒤 뿌리로 보내 옥수수와 호박에 비료를 제공하고, 호박은 큰 잎으로 땅을 덮어 건조함을 막거나 추울 때 보온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수분을 도와주는 벌이 등장하면 네 자매다. 이 동전이 2009년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첫 임기가 시작될 무렵 공존과 화합의 상징으로 발행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최근 시작된 문재인 정부의 첫 국정감사에서 파열음이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적폐 청산 또는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갈등이 주요한 원인이다. 여당은 박근혜-이명박 보수정권 9년의 적폐 청산을 벼르고 있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문 정부를 ‘신(新)적폐’, 노무현 김대중 정부를 ‘원조 적폐’로 규정하며 되치기에 나섰다.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양측의 대치로 국감장 곳곳에서 고성이 오가며 파행도 이어지고 있다.

‘고구마 파동’이 가까스로 수습되자 추석 아침상 분위기는 여느 집과 비슷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큰 걱정을 던 노모의 말이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정부랑 대통령이랑 싹 바꾸었는데 왜 밤낮으로 싸우기만 하냐. 이제 그만 싸울 때도 되지 않았냐. 고구마 줄기처럼 계속 나오는 과거만 파서 어쩌겠다는 건지….”

적폐를 그대로 두자는 국민은 없다. 문제는 그 정도일 것이다. 적폐 청산이 당리당략을 위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돼서는 안 된다. 정치권이 서로에게 할 말이 있는 상황에서 과거 캐기에만 몰두하면, 우리 정치와 사회는 과거사의 미로에 갇힐 수밖에 없다. 공존과 공생, 토론과 합의, 대의와 양보가 어우러지는 지혜의 정원이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 그 정원을 가꾸는 첫 번째 정원사가 되어야 한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