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일 산업부 기자
삼성전자가 빅스비를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알파벳 ‘X’가 들어가서다. 음성인식 프로그램이 쉽게 알아듣는 알파벳이 ‘X’다. 그래서 아마존 AI 플랫폼 알렉사(Alexa)에도 X가 들어간다. 한국 사람이 V보다는 B 발음을 편하게 소리 낸다는 점도 고려했다.
KT는 AI 플랫폼 이름으로 ‘지니(Genie)’를 골랐다. 알라딘 요술램프 속에 갇힌 요정 이름이다. 언제든 말을 걸면 원하는 일을 해주겠다는 풀이가 손쉽다. 중국 알리바바도 AI를 지니라고 부른다. SK텔레콤 ‘누구(nugu)’는 ‘팅커벨’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AI들이 쏟아지니 신학기 새 친구를 만난 듯 기쁜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로 개운치 않은 기분도 지울 수 없다. 내 일상의 언어를 훔쳐 먹으며 커 나가는 친구들이라 그렇다. 기업들이 앞다퉈 내놓는 AI 제품 ‘가정용 스피커’는 뒤집어 생각해보면 ‘말을 빨아들이는 마이크’이기도 하다. 빅스비, 지니, 팅커벨 등 이름(호출어·wake up word)을 불러야 깨어난다지만 실눈을 뜨고 내 일상을 훔쳐갈지도 모를 일이다. 2011년 사용자도 모르는 사이 아이폰에 이동경로가 속속들이 저장됐던 일이 또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이전에도 사용자 말을 듣는 휴대전화 소프트웨어는 있었다. “본부”라고 외치면 전화가 걸렸던 것처럼. 그러나 약속된 대화의 규칙을 벗어나 부르면 알아듣지 못했다. 스마트폰 등장 이전부터 나왔던 음성인식 내비게이션을 써본 사람이라면 ‘홈플러스 합정점’으로 말하면 알아듣고 ‘합정동 홈플러스’로 말하면 못 알아듣는 황당함을 경험했을 것이다.
AI는 이제 대화의 맥락(context)까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 노래 누구 거야?” “그 사람 미국 사람이야?”라고 물으면 ‘그’가 누군지 이해할 정도로 AI는 성장했다.
AI는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지만 커나갈수록 산업계에 미칠 영향도 강력해질 것이 분명하다. 목소리만으로 무엇이든 조작할 수 있으니 애플리케이션(앱)들은 사라지지 않을까. “한국 구성원 모두를 연결했다”고 자평하는 카카오톡이라고 영원할 수 없다. “6시까지 간다고 연락해줘”라면 끝이다. 카카오톡으로 보낼지, 문자로 보낼지는 AI가 결정한다. 유통 산업도 마찬가지다. “통후추가 떨어졌다”고 말하면 AI 업체와 새롭게 제휴를 맺은 곳에서 주문을 할 것이다. 화면을 내려가며 최저가격을 비교했던 엄지손가락과 눈은 이제 해방이 되는 셈이다.
서동일 산업부 기자 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