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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원지수]‘막’ 살면 좋아?

입력 | 2017-10-18 03:00:00


원지수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주변에 유학을 간다는 얘길 꺼냈을 때, 이것저것 해보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도서관에만 있지 말고 열심히 놀러 다니고, 옷도 한번 괴상하게 입어 보고, 아무나 만나 가벼운 데이트도 해보고, 클럽에 가서 밤새 시답잖은 시간도 보내 보고, 심지어는 최대한 문란하게(?) 살아 보라며 진지한 충고를 건네는 이도 있었다. 네가 언제 어디서 또 그렇게 맘대로, 혹은 막 살아 보겠느냐며, 한국에서 못 해봤던 것을 다 해보라는 사람들의 눈빛엔 부러움과 답답함이 섞여 있었다.

여기서 ‘못 해봤던 것’이란 그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한국이라서’ 하기 어려웠던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한국에서 해보지 못한 것은 뭐가 있을까? 주변의 말처럼 쫙 빼입고 파티 가기? 일회용 데이트? 길거리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기?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한국사람’들이 잘 차려입고 부담 없는 데이트를 즐기며 길거리에서 훌륭한 버스킹과 비보잉을 선보이는 걸 생각하면 그것들은 ‘한국’이 주는 제약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라는 사람에게 그것들은 여기선 안 되고, 저기선 되는 것일까?

범생이 이미지를 가진 내게 그들이 건넨 조언은 결국 외국에 나가는 기회를 이용해 ‘일탈’을 해보라는 이야기다. “거기선 누구라도 될 수 있잖아!” 물론 흥분이 되는 일이긴 하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의 새로운 삶,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내 맘대로 살아도 좋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진정한 일탈의 기회.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내게 정말 (미친 듯이 하고 싶었지만) ‘못 해본’ 거였던가?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느라, 부모님의 기대를 맞추느라, 나는 내 안에 흘러넘치는 흥을 누르고 억지로 자아를 외면하며 살아온 것이었을까?

불과 1년여 전까지 내 인생에 존재할 거라 생각지도 않았던 대학원이라는 것을 가기로 결심하게 된 데에는, 농담 같지만 ‘인생에서 한 번쯤은 실컷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라는 동기가 가장 컸다. 하루하루 나 스스로가 소비되기만 하는 듯한 느낌에 지치곤 했던 지난 직장 생활 동안 내가 ‘기회만 있다면 꼭 해보고 싶다’며 바랐던 것은, 오히려 학부 시절 실컷 놀기만 하느라 전공 책 한 권 빌려 보지 않았던 도서관에 틀어박혀 제대로 된 공부를 한번 해보는 것이었다. 시험 전날 프린트물을 씹어 먹을 기세로 외우는 것 말고, 궤변으로 시작해 교수님 사랑한다며 끝내는 의미 없는 과제 말고, 무언가 궁금해서, 알아가는 것이 즐거워서, 묻고 파고들고 채워가는 진짜 공부 말이다.

나 자신이 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지금껏 하지 않았던 일들을, 눈치 볼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나의 중심을 잃고 맘대로 하며 사는 것이 진정 내 맘대로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유학이라는 두 글자에 가려져 있던 수많은 구체적인 고민들과 선택들을 거친 후, 그것이 얼마나 ‘나 다운’ 것을 찾아가는 과정인가를 알게 됐다. 그렇게 어렵게 마련한 기회를 최선을 다해 나를 잃어버리는 데에 쓰는 것보다는, 한국에선 일단 대학에 가느라, 일단 취업을 하느라 미뤄 두었던 ‘가장 나다운 일들’에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어쨌거나 다른 나라에 가서 공부를 하기로 한 선택 자체가 한국에선 해보지 못할 큰 경험이 될 테니까.

오늘도 노트북과 도시락과 읽을거리를 한 가득 싸들고 도서관에 왔다.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맥 빠진 출근을 하다가,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긴장과 두근거림으로 한 장 한 장 책을 넘기는 나의 일탈이 즐겁다. 이것 또한 곧 벗어나고 싶은 일상이 될지언정, 최소한 그때까지는 한국에선 해보지 못했던 이 ‘자발적 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해보고 싶다.
 
원지수 제일기획 카피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