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 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개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가을에 대한 많은 시편들 중에서도 최승자의 이 작품은 도드라진다. 모든 계절은 신의 선물이며, 그중 자연이 주는 곡식과 열매를 길러 거두는 가을은 시인뿐 아니라 시인 아닌 사람들에게도 경건의 의미가 담긴 계절이었다. 그런 가을을 두고 최승자는 ‘개 같은 가을’이라고 했다. 그는 여기에다 다시 이 계절을 ‘매독 같은 가을’이라고까지 ….
흔히 시인은 노래한다고 하는데 이 시어들은 노래가 아니라 뱉어내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시편을 따라 읽는 우리는 시인의 ‘뱉음’이 가을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모든 금기에 대한 뱉음이다. 이 지독한 시어들에선 타버릴 것 같은 열기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숱한 이들이 연애편지를 쓰고 밀어를 속삭였을 이 계절에, 시인은 그 열렬한 감정의 그림자를 보았다. 사랑이 있으면 어찌 이별이 없을까.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 걸어 불러도 대답은 없다. 떠나간 애인을 다시 부르려 해도 헛된 일이다. 시인은 그렇게 가을의, 사랑의 잔혹함을 정면으로 들추어낸다.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는 시인의 믿음은 그런 가차 없음에서 나왔다.
오랜 투병 뒤에 내놓은 최근의 시집들은 담담하고 소박하다. 시를 쓰지 못했던 시간들을 지나 다시 만난 최승자의 간소한 시편들은 얼핏 간소한 듯하나, 불필요한 것들은 모조리 쳐내고 언어의 뼈만 남겨 전하겠다는 시인의 치열함은 그대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