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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동아/10월 21일]1994년 성수대교 허리가 끊기다

입력 | 2017-10-20 18:23:00


다리 한가운데가 끊긴 성수대교. 동아일보DB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 출근하는 차들로 도로는 꽉 차 있었다. 비에 젖은 다리 위도 미끄러웠다. 그러나 위험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회사원 신명훈 씨는 자신이 탄 프라이드 승용차의 계기판을 봤다. 시속 30㎞였다. ‘출근길 정체치곤 괜찮다’고 생각하던 순간, 갑자기 다리 상판이 솟구쳐 올라왔다. ‘지진인가’. 신 씨는 급히 차량 문을 열고 빠져 나가려 했다. 그 때, 다리 상판과 함께 차가 20여m 아래로 떨어졌다.

이튿날 동아일보 29면에 실린 사고의 재구성이다. 신 씨가 정신을 찾았을 때 다리 상판은 물 위에 떠 있었다. 신 씨의 승용차도 그 위에 그대로 떨어져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 성수대교 붕괴로 출근길 회사원과 등굣길 학생 등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가운데가 떨어져 나간 다리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 해의 가장 충격적인 사고였다.

성수대교는 트러스식 공법으로 만든 다리다. 대형 강관을 요철 방식으로 끼우듯이 연결하는 이 공법은 교각 사이를 길게 할 수 있지만 연결 부분이 하중에 약한 게 단점이다. 검증에 들어가면서 이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임이 속속 드러났다. 당초 다리 밑 부분을 연결하는 트러스가 제대로 연결돼 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판을 지탱하는 철골구조물(트러스) 고정핀 주변의 H빔이 심하게 부식됐다. 문제는 “정기점검 때 상판의 밑 부분까지 이상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데 상판 위에서 형식적인 점검만 해온 것”이었다.(동아일보 1998년 10월 23일자 1면)

성수대교 붕괴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94년 10월 22일자 1면.


이 충격적인 사고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화의 수장(水葬)이기도 했다. 성수대교 자체가 1970년대 후반 ‘빨리빨리’ 개발주의로 빚어진 부실시공의 산물이어서다. 그 해 12월 동아일보는 한 해를 정리하며 “희생자 부상자는 물론 유족 및 가족들의 가슴에 못질을 하고 건설 한국의 명예에 먹칠을 한 흉물 성수대교는 우리 사회의 적당주의와 ‘빨리빨리’ 습관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오늘도 한강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고 전했다(동아일보 1994년 12월 16일자 31면) 이듬해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면서 1990년대 중반은 대형 참사로 얼룩진 시간이 됐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