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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왜군, 영호남 일부 1년 넘게 실질 통치… 이순신과 대치

입력 | 2017-10-21 03:00:00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16>
16화 왜장, 호남의 왕 행세를 하다




호남의 실질적 지배 책임자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장기간 주둔하면서 조선 백성들을 통치한 순천 왜교성. 왜군의 호남 점령 정책 본거지인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이순신은 장도(가운데 공단 건너편의 섬)에서 정유재란 최후의 전투를 벌였다. 순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하나-조선 군현(郡縣)에서 지금 이후로는 사민(士民)과 백성 된 자는 각기 향읍(鄕邑)으로 돌아가 오로지 농사에 힘써라.

하나-조선의 상관(上官·관리)들을 곳곳에서 찾아내 잡아 죽여라. 그 처자와 따르는 무리(從類)들도 주살토록 하며, 상관의 집은 불을 질러 태워 없애라.

하나-군현 안에서 사민과 백성이 상관들의 숨어 있는 곳을 고해바치는 경우 포상을 한다.

하나-지금부터 죽을죄를 면한 군현의 인민들이 돌아와서 살지 않고 산곡(山谷)으로 가는 경우엔 모두 집을 불태우고 참살하라.

하나-이 방문(榜文)을 어긴 왜졸(倭卒·일본 병사)을 주살할 것이며, 흉악한 짓이 발생하면 건건이 행장(行長·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서면으로 보고하라.’(日本 시마즈 요시히로 가문, ‘島津家文書’)

이순신이 서남해안의 섬을 돌며 조선 수군 재건에 부심하던 무렵인 1597년 9월, 강진·해남·곤양·창원 등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 내륙에는 이 같은 방문이 일제히 내걸렸다. 그해 7월 칠천량 해전 승전의 기세를 몰아 전라 내륙 전역과 경상도 남해 연안을 장악한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우키타 히데이에 등 10여 명의 왜군 장수들이 연명으로 발표한 포고령(全羅道海南定榜文寫)이었다.

그간 일본 육군은 정유년 9월 초 경기도 직산 일대에서 명군의 반격으로 북상을 멈춘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로 남하하면서 코 베기 등 학살과 노예사냥, 재물 약탈 등을 자행했다. 그해 9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전라도 내륙을 완전 초토화했다. 호남은 바둑판처럼 포진한 왜군이 50여 둔(屯)에 달했을 정도였다.(‘난중잡록’) 전라도를 완전 점령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완수한 왜군은 점령지 통치 행위에 들어갔다. 조선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조선 의병과 조명(朝明) 연합군의 반격에 맞서 호남 내륙과 남해 연안 지역에 집중해 확실하게 이곳을 통제하려는 왜군의 전략이었다. 왜군의 점령지역 통치행위는 이때부터 이듬해 11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해 왜군이 조선 땅에서 완전히 쫓겨날 때까지 이어진다.



당근과 채찍의 선무 공작

왜군은 정유재란 초기에 자행한 방화, 약탈, 살육, 납치 등 폭력적 수단으로는 침략 전쟁을 장기적으로 성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조선인들을 회유해 자신들과 동화시키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조선인의 분열을 조장하는 ‘당근과 채찍질’ 수법을 동원했다.

왜군은 우선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조선인을 색출해 처단했다. 조선 관리들과 지역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들의 관군 참여와 의병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그 은신처를 신고케 하고, 적발된 이들은 가족은 물론 가택까지 없애 버렸다.

대신 상관들을 신고하거나 직접 잡은 조선 백성에게는 일본의 백성(御百姓)으로 동등하게 대우하고 영지를 포상으로 내렸다. 또 왜군에게 복속하는 조선 백성들에게는 민패를 발급했다. 이들을 권농(勸農)이라고 했다(조선에서는 순왜(順倭)라고 불렀다).

왜군은 권농들을 앞잡이로 내세워 각처에 숨어 있는 백성들을 회유해 데려오도록 했다. 산으로 도망간 조선인들을 유인하기 위해 쌀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왜군의 회유책은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갔다. 당장의 끼니 해결과 목숨 부지를 다행으로 여겨 투항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민패를 내주며 백성을 달래고 쌀을 주니 곤궁한 인민이 다투어 들어갔다.”(‘난중잡록’)

그렇게 회유된 조선 백성들은 왜군과 한 마을을 이뤄 살았다. 구례에서는 왜군 수십 명이 흰 깃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가운데, 조선인 남녀 200여 명이 장막 속에서 면화와 벼를 수확해 200여 칸이나 쌓아 놓은 것이 명군에게 발견되기도 했다.(‘선조실록’)

왜군으로부터 민패를 받은 권농들은 가을철에 거둔 벼와 곡식 중 쌀 3말을 왜군에게 세금으로 바쳤다.(‘난중잡록’) 왜군 지휘부는 조선 농민으로부터의 연공수납(年貢收納)은 5분의 1 혹은 4분의 1 수준으로 제한했다. 자신들이 조선 정부보다 더 자비로운 권력 행세를 한 것이다.

왜군에게 저항하지 않고 세금을 꼬박꼬박 바치는 권농들은 재산권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았다. 왜군은 권농들이 주로 다니는 대로에는 왜병의 난동과 행패를 감시할 헌병 같은 병력을 배치하기도 했다. 왜군의 점령 행위가 갈수록 공교화하자, 자발적으로 왜군을 찾아가는 지방 사족(士族)도 늘어났다.

“순천에 사는 사족 박사유는 처음부터 왜적에게 붙어 자기 딸을 행장(行長·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시집보냈는데, 행장이 하는 일은 모두 사유가 지휘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유는 훗날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아들 박정경과 왜물(倭物)을 바리로 싣고서 남원에 나와 명나라 장수 오도사(吳都司)에게 수레째 바치고 여러 가지로 아첨을 하였다. 또 다른 아들인 박여경은 그 누이동생을 따라 아직도 행장이 거처하는 왜교성에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허실(虛實)을 관망하고 한편으로 중국 장수에게 붙어 의지하고 있으므로 함부로 처치하기가 낭패스럽다.”(‘선조실록’)

전라도 동복의 생원(生員) 김우추는 관할 지역 왜장에게 아부하는 글까지 보냈다. “누구나 부리면 백성이요, 누구나 섬기면 임금이니 (귀국의) 한 호(戶)로 편입돼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난중잡록’)고 했다.

이처럼 일부 지역 사족은 조선 건국 이후 200여 년간 기득권층으로서 누려온 특권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득권을 연장하기 위해 왜군에게 붙어 부역했다.

조선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도 이런 부역 행위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임진왜란 때 영남이 왜군의 소굴이 되자, 영남에서 부담해야 할 공부(貢賦)를 호남에서 전적으로 도맡아 해결했다. 호남의 재원이 조선을 먹여 살릴 정도로 호남은 막대한 세 부담을 졌다.

그런데 정유재란이 발발해 호남이 정작 왜군에게 점령당하자, 호남은 내팽개쳐졌다. 왜군 점령 하에 있다가 조명(朝明)연합군이 수복한 지역에선 세 감면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호남 백성들은 “우리들은 임진년 무렵에 죽을힘을 다해 관가에 제공했는데, 정유년 이후로 관가에서는 옛 노고를 생각해주지 않고 독징(督徵)만 더욱 엄격하게 하고 있다”(이항복의 ‘백사집’)고 불만을 토로했다. 호남의 사족들 역시 당쟁과 차별 대우로 사기가 꺾여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을 천상(天上)의 허황된 일처럼 여길 정도로 좌절했다.



노동력 착취로 급조한 왜성에 웅거하며 양민착취

일부 사족은 부역의 길로 나갔지만 대다수 양민들은 당근이 아닌 채찍질만을 받았다. 왜군은 한반도에 주둔할 성을 지으면서 가혹한 노동 착취를 일삼았다. 고니시는 1597년 9월 1일부터 순천의 왜교(倭橋)에 주둔한 뒤 장기적인 호남 지배를 염두에 두고 왜교성을 쌓기 시작했다. 고니시는 순천 일대는 물론 광양 등 사방에 군사를 보내 각지의 읍성을 장악하고, 왜교성을 축성할 노역자들을 징발했다. 승려들도 붙잡혀와 노역에 동원됐다. 1597년 9월에 시작한 왜교성 축조가 불과 3개월 만인 12월 초에 완성됐을 정도로 혹독한 노동력 착취가 이어졌다.

순천 왜교성과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울산의 왜성 축성 과정을 목도한 왜군 종군승 게이넨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 양민들은)새벽 안개를 헤치고 산에 올라가 하루 종일 큰 나무를 베고 밤하늘의 별이 총총할 때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밤을 새워 돌을 쌓아 성을 축조하는 것은 백성은 어떻게 되든 안중에 없고 오로지 탐욕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괴롭고 싫은 표정의 눈초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죄업이라고 몰아붙여 심하게 질책하고, 목울 쇠사슬로 묶어 두들겨 패고, 달군 쇠로 몸을 지져댔다. 보기에 곤혹스러울 정도다.”(‘朝鮮日日記’ 1597년 11월 11∼16일)

당시 저잣거리엔 노역의 혹사를 못 이겨 도망치다가 왜군에게 붙잡힌 조선인의 목이 내걸리곤 했다. 조선인의 피땀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모두 8개의 왜성이 신축됐다. 1597년 말까지 왜교성·남해성·사천성·고성성·거제성·창원성·양산성·울산성이 지리적으로 점선처럼 연결돼 지어졌고,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도체찰사 신분으로 현지를 정탐한 이항복은 “동쪽의 울산 도산에서 서쪽의 전라도 순천 왜교에 이르기까지 병영이 줄지어 섰는데 무려 900여 리나 됐다”며 “왜군이 오래 머무르면서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기록했다(‘月沙集’)

이 중 유일하게 호남지역에 축성된 왜교성은 고니시 군의 주력 대군이 주둔했다. 호남 지배의 거점이었던 것이다. 이들 성은 왜군이 장기간 지배 통치하려는 점령군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이순신과 왜군의 호남 통치권 싸움

정유재란기에 축성된 일본왜성과 이순신의 수군기지인 고하도(1597년 10월∼1598년 2월).

1597년의 겨울이 깊어가면서 전황은 왜군에게 불리해졌다. 9월 16일 이순신의 명량해전 승전 이후 조명 연합군의 남하로 왜군들은 점차 장악 지역을 잃어갔다. 세 불리를 느낀 왜군은 왜성을 근거로 웅거하면서 다시 강압적인 수탈과 방화를 일상화했다. 전황이 바뀌면서 마을에서 권농으로 있던 조선 농민들 가운데는 산으로 숨어 들어가 게릴라가 되는 경우가 속출했다.(‘島津義弘書狀’) 어쩔 수 없이 왜군에게 면종복배(面從腹背)하던 조선인들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고니시가 지배하던 순천 지역에서 이런 움직임이 활발했다. 순천의 훈련원 첨정(僉正) 박이량은 왜군 진영에서 처자가 피살된 후 ‘복수 의병군’을 일으켜 주암에 주둔한 왜군들을 상대로 싸워 전과를 올렸다. 보인(保人) 백비호는 자진해 전라병사 군관이 돼 매번 전투의 선봉에 서서 적병을 참살하고, 적의 군량창고를 급습해 불태우는 등 전공을 세워 명나라 장수들까지 그에 대한 포상을 조선 정부에 요청할 정도였다.(‘선조실록’) 평범한 여인까지도 나섰다.

“왜적이 (순천의) 용두와 해촌 사이에 주둔해 있으면서 농사를 권하고 마을에서 세금을 거두어가곤 했다. 왜적 한 명이 강씨 여인 집에 찾아와 세금을 더 내라고 협박했다. 강씨는 왜놈이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 협박하면서 세금을 거두는 것에 분기가 일어나 이내 곧 그를 죽일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먼저 (왜군에게) 술을 권해 먹인 뒤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해놓고서 부엌에 들어가 식칼을 갈아두었다가 왜적이 술에 취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칼로 찔러 죽였다.”(조범현의 ‘강남악부’)

시골 가정집 여인이 혼자 힘으로 왜병을 죽이려는 적개심을 가질 정도로 왜군의 횡포가 심했다. 순천 등 바닷가 해안 마을이 특히 그랬다. 정유년 겨울을 신안 안편도와 목포 고하도 등 섬 지역의 수군 진영에서 보내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명량해전 이후 왜군의 보복 행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가슴 아파했다. “해남의 향리 송원봉과 신용 등이 적진으로 들어가 왜놈을 꼬드겨 그곳의 선비들을 많이 죽였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13일)는 보고를 받고서는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이에 이순신은 수군 휘하 장졸들을 육지로 보내 부역 행위자들을 처단토록 했다. 수군 병사들은 해남에 들어가 왜적 머리 13급과 투항한 송원봉 등의 머리를 베어오기도 했다. 이외에도 왜군에게 붙었던 윤해와 김언경, 사족의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 등은 직접 목을 베어 효시토록 했다.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이 수군 재정비를 위해 106일간 머물렀던 목포 고하도의 수군 진영(가운데 오목한 곳). 이순신은 이곳에서 정유년 겨울을 나면서 수군과 의병들을 지휘해 호남의 통치권을 확보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목포=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이순신은 호남의 의병들과도 긴밀히 관계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후 승병(僧兵)을 이끈 송광사 의승장 혜희, 흥양 의병장 신군안, 강진 의병장 염걸 등에게 의병장 직첩을 수여하는 등 의병활동을 관리했다. 해남의 의병이 왜군 머리 1급과 환도 한 자루를 가지고 와 이순신에게 바치면서 승전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임의로 활동해 군율을 어긴 의병장에게는 벌도 내렸다. 영암의 향병장(鄕兵將)이 왜적을 토벌한 연유를 보고하지 않아 곤장 50대를 쳤다.(‘난중일기’)

이순신은 왜군의 호남내륙 점령 정책을 약화시키기 위해 왜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순왜(順倭)들,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강간과 약탈을 벌인 범법자들을 색출해 죄를 묻는 등 호남의 치안력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호남 통치권을 두고서 바다의 이순신과 육지의 왜군이 이듬해 말까지 약 1년간 치열한 대민(對民) 압박전을 벌인 것이다.

순천·목포=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