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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 City]北탱크 막을 바리케이드 겸용 빌딩

입력 | 2017-10-23 03:00:00

<16> 영화 ‘희생부활자’ 속 유진상가




영화 ‘희생부활자’의 배경인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유진상가(위 사진). 1993년 내부순환로 건설로 B동 3∼5층은 철거됐다. 영화에서 숨진 엄마 김해숙을 아들 김래원이 업고 뛰고 있다. 뒤로 보이는 기둥이 바로 유진상가 기둥이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아들 잘되기만 바라며 평생 시장에서 뒷바라지한 엄마(김해숙)는 아들 전세금을 가져다주려고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아들(김래원)은 친구와 통화하며 맞은편에서 천천히 건넌다. 이때 오토바이 사고로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엄마를 본다. 영화 ‘희생부활자’는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유진상가 앞에서 벌어진 의문의 사건으로 시작한다. 엄마가 쓰러진 배경에는 거대한 그리스 신전에서나 볼 법한 기둥들이 보인다. 유진상가 B동을 받치는 기둥이다.

1970년 지은 유진상가아파트는 당시 서대문구 랜드마크였다. 주상복합건물로 1, 2층은 상가, 3∼5층은 아파트였다. 군 장성, 외교관, 청와대 직원 등 이른바 고위층이 많이 사는 고급 주택단지였다. 전용면적 109∼221m²(옛 33∼67평)로 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넓었고 옥상에는 정원과 놀이터가 있을 정도였다. A, B동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고 일반 아파트보다 세로가 길다.

단순히 고급 주택단지만은 아니었다. 고위 군인이 많이 산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유진상가아파트는 주거지이면서 수도 방위 임무를 띠고 서울 서북부를 지키는 일종의 ‘본부’였다.


1968년 1월 21일 완전 무장한 북한군 소대 병력이 청와대 근처까지 별다른 제지도 받지 않고 들이닥쳤다. 충격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훈령 28호 ‘대외 비정규전 작전지침’을 내렸다. 지금은 북한 핵미사일로 단시간에 서울이 초토화된다며 걱정하지만 당시 가장 큰 위협은 북한군이 침투해 벌일 시가전이었다.

당시 북한군 전차부대의 서울 침공 루트 가운데 하나는 서북지역인 문산∼구파발이었다. 홍은동은 경기 문산에서 은평구 불광동을 거쳐 독립문으로 이어지는 이 길의 요충지다. 유진상가아파트는 서북지역이 뚫렸을 때 아군 진지를 겸하는 건물인 셈이었다. 은폐·엄호물로 사용하다 유사시 폭발시키면 그대로 주저앉아 홍제천을 가로막는 ‘바리케이드’ 역할까지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를 위해 유진상가아파트는 다른 아파트보다 유난히 콘크리트를 많이 쓴 건물로 알려져 있다. ‘못 하나 박기 어렵다더라’ ‘1층 상가 앞 기둥 밑은 탱크가 들어올 만한 높이’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 유진상가아파트 B동 3∼5층은 철거됐고 내부순환로가 바로 옆을 지나간다. ‘유진맨숀A’라는 낡은 글씨만이 A동에 남아있는 이유다. 당초 유진맨숀B동은 홍제천을 복개(覆蓋)한 시유지에 지었다. 철거할 때 보상 없이 부지를 시에 반환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그러나 1992년 내부순환로 건설에 들어가면서 B동 주민들이 강하게 서울시에 보상을 요구했다. 결국 1997년 B동 94가구에 보상을 해주고 철거했다. 현재는 소음 문제로 B동 2층도 입주를 꺼려 서대문도시관리공단이 입주해 있다.

유진상가아파트는 사라지느냐 마느냐를 놓고 10년간 논란을 빚었다. 2007년부터 유진상가아파트와 바로 앞 인왕시장까지 재개발사업이 추진됐다. 면적 4만 m² 일대에 업무시설 1개 동과 지상 최고 48층 규모의 아파트를 짓기로 했지만 2015년 사업시행인가가 반려됐다. 올 1월 조합원 63%가 재개발사업에 반대하면서 결국 백지화됐다. 시민들이 퇴근길 과일과 채소 반찬거리를 사갈 수 있는 작은 가게들로 가득한 유진상가는 당분간 그 모습을 유지하게 됐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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