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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개성상인의 후예’ 이수영 OCI 회장

입력 | 2017-10-23 03:00:00

한국 태양광산업 이끈 ‘화학업계 거목’




폴리실리콘은 태양광 발전의 핵심 소재다. 2006년 당시만 해도 태양광발전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최초로 이 물질을 대량생산하기로 결정하고 4000억 원을 투자한 회사가 바로 OCI다. 회사 내부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그럼에도 이를 가능케 했고 시작 3년 만에 생산 규모에서 세계 3위 안에 드는 회사로 키워낸 것은 한 사람, 이수영 OCI 회장의 결단 덕분이었다.

이 회장이 21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5세.

이 회장은 1942년 고 송암(松巖) 이회림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창업주는 개성에서 태어나 상인들에게 일을 배운 뒤 스스로 상회를 세워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 창업주는 신용과 근검을 제일로 여기는 ‘마지막 개성상인’으로 불렸다. 이 회장도 부친의 영향을 받아 생전 입버릇처럼 “남에게 피해 줄 일, 욕먹을 일 하지 마라. 돈은 그 다음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이 가업에 발을 들인 것은 1970년. 연세대 행정학과와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현 OCI 전신인 동양화학에 전무이사로 입사했다. 당시 흔치 않은 유학파 출신 경영자로 해외 기업과 손을 잡거나 인수합병(M&A)에 거침이 없었다. 1979년에는 사장으로 승진했고 부친이 별세하기 11년 전인 1996년 회장에 취임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화학원소로 이뤄져 있고, 사업도 그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이 회장은 50년간 오직 화학산업에 혼신의 힘을 쏟아 ‘한국 태양광발전의 개척자’ ‘화학업계의 거목’으로 불렸다.

아내 김경자 여사(OCI 미술관 관장)와의 러브스토리도 회자된다.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서울 종로구)에서 살았던 부부는 오랜 시간 서로 알고 지내며 사랑을 키웠다. 성인이 된 뒤 김 여사는 중앙일간지 기자가 됐고 이 회장이 미국 유학길에 올라야 했을 때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결혼 전부터 집안에서 반대를 했기 때문에 이 회장은 유학 중 한동안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 회장은 ‘인천 인맥의 대부’로도 불렸다. 김정치 전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조양호 한진 회장 등이 이 회장과 교류한 인천 출신·지역 인사들이다. OCI의 시초가 된 소다회 공장이 바로 1968년 인천에 세워졌다. 인천에 있는 송도학원과 송암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은 것도 선대 회장의 고향인 개성에 있던 학교가 6·25전쟁 당시 인천에 내려와 다시 세워졌고, 이 사정을 알게 된 이 회장이 재정난에 빠져 있던 학교 재단을 지원한 인연이 있어서다.

이 회장은 ‘기업도 시민’이라며 사회공헌에도 힘썼다. 어린 시절 개성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 속에 1978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을 지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는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을 맡아 노사 간 대화를 잇는 데 힘썼다. 이 과정에서 자식뻘의 기자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던 소탈한 모습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경총은 이날 애도 성명에서 “이 회장은 2009년 글로벌 경제위기 때 노사민정(勞使民政)의 대타협을 이뤄내 조기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고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 여사, 장남 이우현 OCI 사장, 차남 이우정 넥솔론 관리인, 장녀 이지현 OCI 미술관 부관장이 있다. 이복영 삼광글라스 회장과 이화영 유니드 회장은 동생이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영결식은 25일 오전 8시에 열린다. 02-2227-7550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