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 출판평론가
문학과지성사가 1981년부터 펴낸 ‘현대의 지성’ 시리즈는 피터 L 버거의 ‘이단의 시대’부터 최근 에리카 피셔-리히테의 ‘수행성의 미학’까지 165권이 나왔다. 출간 발걸음이 더디지만 알차다. 정문길의 ‘소외론 연구’, 박이문의 ‘예술철학’, 한상진의 ‘민중의 사회과학적 인식’ 등 우리나라 학자들의 논저 외에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등 20세기 명저를 다수 소개했다.
1996년 A N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모험’을 시작으로 2016년 10월에 150권을 돌파한 한길그레이트북스는 대표적인 고전·명저 총서다. 21세기에 들어와 더욱 주목받는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체주의의 기원’ 등도 이 시리즈로 우리 독자들과 만났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야드총서는 소르본대의 문화·학술 공헌에 필적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31년 9월 시인 보들레르의 작품집이 첫 권으로 나온 이후 라신, 볼테르, 에드거 앨런 포, 스탕달 등의 작품집이 연이어 나왔다. 800권 가까운 책 가운데 최고 베스트셀러는 40만 부 가까이 팔린 생텍쥐페리 작품집이다.
기획 취지를 지키면서 책의 질을 꾸준히 유지하고 오랜 세월 이어지는 총서는, 해당 출판사뿐 아니라 한 사회의 출판 수준을 가늠케 한다. 나아가 한 국가의 문화 역량에 대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20년 이상 나오면서 권수가 세 자릿수를 넘긴 우수한 총서가 몇 개나 있는가?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