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경제부 차장
신고리 5, 6호기 공사를 중단하자는 측이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의 숙의 과정 때 틀었던 영상은 이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어 “전기만큼이나 많은 눈물과 분노를 생산했다”며 원색적인 비난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핵은 죽음’ ‘우리 다 죽이고 그 위에 세워라’ 같은 원전 반대 시위 때 내걸린 현수막들도 영상물에 담겼다. 신고리 이름에 ‘옛 고(古)’가 들어간다며 “낡음은 새로움을 이길 수 없다”는 억지춘향식 논리도 등장했다. 영상물 어디에도 오일쇼크를 극복하고 에너지 자립에 기여해 경제 발전에 힘을 보탠 공(功)은 없었다.
중단 측은 ‘전기는 남아돕니다’라는 문구를 수차례 반복해 보여주기도 했다. 전기가 모자라 나라가 마비됐던 2011년 대정전이 불과 6년 전이었지만 일언반구도 없었다. 신고리 5, 6호기 건설에 이미 1조6000억 원이 투입됐다는 지적에는 ‘주식에 손절매가 중요한 것처럼 지금 공사를 멈춰야 7조 원을 아낄 수 있다’는 궤변에 가까운 주장도 나왔다.
‘진행 중인 원전 건설을 중단하는 식의 급격한 탈원전은 안 된다. 우선 원전 안전성을 높이고 신재생에너지 기술 개발에 힘쓰자. 그 뒤에 차분히 탈원전을 논의해도 늦지 않다.’ 시민참여단이 공론화 기간 숙의해 내린 결론은 이렇게 요약된다. 상식이 있는 건전한 시민이라면 부정하기 어려운 합리적 해법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신고리 건설과 탈원전은 별개”라고 공론화위 조사 결론을 곡해하며 에너지 전환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당장 오늘 발표할 원전 축소 로드맵의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방침이 대표적이다. 월성 1호기는 가만히 둬도 2022년이면 문을 닫아야 한다. 올해 7월 영구 정지한 고리 1호기가 폐로(廢爐) 결정 후 2년의 준비 기간을 거쳤듯 오늘 결정한다고 내일 폐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월성 1호기는 규제기관(원자력안전위원회,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이 무려 5년에 걸쳐 안전 검증과 스트레스 테스트를 거친 끝에 수명 연장을 결정한 시설이다.
원전이 위험하다고 지우개로 지우듯 없앨 순 없다. 적법한 절차를 밟아 가동 중인 원전을 몇 년 빨리 문 닫겠다며 보여주기식 정책에 골몰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원전에 적용되는 안전 기준이 적절한지 따져 보고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포함한 에너지 믹스 장기 정책 마련에 힘을 쏟을 시기다. 정부 말대로 60년간 진행될 탈원전 정책을 공론조사 발표 나흘 만에 뚝딱 확정해 밀어붙이는 것이야말로 국민의 뜻에 반하는 일이다.
이상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