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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의 길]모욕을 참아라, 진정 이적이 찾아올지니

입력 | 2017-10-25 03:00:00

<8> 홍익대 앞 잔다리




윤동주가 산책했던 ‘잔다리 마을’은 서울 홍익대 앞 동·서교동의 옛 이름이다. 현재는 ‘잔다리길’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고 경의선 책거리 등 문화시설과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서울 마포구 지하철 홍대입구역이나 합정역 언저리 어디에 그의 자취가 있을까. 젊은 영혼들이 반갑게 만나고 헤어지는 번화한 거리는 1938년 너른 들녘이었다. 이 들녘에 연희전문에 입학하고 두 달 보름 지난, 스물한 살 윤동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 것은
참말 이적(異蹟)이외다.

오늘따라
연정, 자흘,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이적(異蹟)’(1938년 6월 19일)




윤동주는 ‘이적’ 육필 원고 끝에 ‘모욕을 참어라’라는 단말마 같은 글귀를 남겼다.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보리이까’, ‘나를 불러내소서’라는 구절에서 보듯 기도문이다. 아이 적부터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던 사진이 네 장 남아 있는 그의 시에는 성경에서 얻은 모티프가 많다.

‘이적(異蹟)’이라 하면 죽을병에서 낫거나, 복권이 당첨되는 기적을 떠올린다. 그가 생각했던 이적은 무엇일까. 호숫가에 가기 전에 그는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왔다고 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를 받을 때 신발을 벗듯 윤동주는 터분한 것, 그러니까 지저분하며 개운치 않고 군색한 것을 버리고 섰다는 말이다.

윤동주는 물 앞에 서면 자신을 성찰하곤 했다. 물결 위에 떠있는 달을 보며 내면을 성찰하고(‘달을 쏘다’), 우물 안에 자신을 투영해보기도 하고(‘자화상’), 냇가에 앉아 성찰하기도(‘산골 물’) 했다.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라는 구절은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오는 예수를 보고 자신도 걸어보려 했던 베드로 이야기, 마태복음 14장의 패러디다. 바로 전에 예수는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으로 5000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였다. 게다가 그냥 물 위를 걸었다. 베드로는 예수처럼 호수 위를 걸을 수 있는 서커스 같은 ‘이적’을 흉내 내고 싶었다.

윤동주는 베드로와 다르다. 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는 ‘부르는 이 없다’는 말과 ‘불리워’ 왔다는 말은 서로 맞지 않는다. 부르는 이가 없는데도, 까닭 모를 이유로 불리어 왔다는 것은 ‘참말 이적’이라고 한다. 신의 부름을 듣지 못했어도, 전혀 모를 황당한 미래 앞에 ‘불리워 온’ 것이 기적이라는 말이다.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는 횡재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살아온 일상 자체가 ‘참말 이적’이라는 말이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적을 체험하는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보다, 그저 ‘따순 햇살’ 아래 살아가며 운명에 부닥치는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를 ‘참말 이적’이라며 그는 감내한다. ‘내사’는 ‘나야말로’, ‘나 같은 것’이라는 겸손한 표현이다. 나처럼 부족한 존재가 부르는 이도 없는데 이 호숫가로 불리어 온 것이 ‘참말 이적’이란다.

이어서 ‘터분한 것’들이 나온다. 원고를 보면 자긍(自矜), 시기(猜忌), 분노(憤怒)라고 써 있는데, 분노를 지우고 맨 앞에 ‘연정’을 써넣었다. 시를 교정할 때 윤동주에게 심각했던 문제는 분노보다 연정이었겠다. ‘이적’과 같은 날에 쓴 시 ‘사랑의 전당’에 그는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라고 썼다.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먼저 떨어졌습니다.’(‘그 여자’)에서 ‘붉은 능금’이라는 구절은 대단히 유혹적이다.

자기도취인 자홀(自惚)이나 쪼잔한 시기와 함께 터분한 욕구들이 오늘따라 ‘금(金)메달처럼 만져’진다. 바로 그 금메달 같은 ‘모든 것을 여념(餘念) 없이/물결에 씻어 보내’겠단다. 어설픈 너스레를 씻어버리며 ‘참말 이적’으로 살아가겠다니, 당연히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새로운 길’)일 수밖에 없다.

망망한 ‘호수 위로 나를 불러내소서’라고 마무리한다. 퇴고 전에는 원고를 보면 ‘이 호수 위로/나를 불러내소서/걸으라 명령하소서!’였는데 ‘걸으라 명령하소서!’를 삭제했다. ‘걸으라 명령하소서!’라고 하면 특별계시가 된다. 이 문장을 지웠을 때 물 위를 걷지 않아도 시련을 당하겠다는 다짐이 돋아 보인다.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사랑의 전당’)는 깨달음에는 운명에 당차게 단독자로서 나서는 키르케고르의 자세가 겹친다. 이상섭 교수는 이 시를 쓴 배경을 이렇게 추측한다.

“지금의 서교동 일대(1960년대까지 ‘잔다리’라고 했다)에는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의 홍익대 앞 신촌 전화국 근처에 아주 큰 연못이 있었는데 1950년대에도 거기서 낚시질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 옛글에 보면 한양 팔경 중에 ‘서호낙일(西湖落日)’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서교동, 합정동 일대, 즉 서강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해 지는 풍경을 가리켰다. 윤동주가 묵던 기숙사에서 잔다리의 연못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기서 10여 분 더 걸으면 강가(서강)에 도달했다. 아마도 1938년 초여름 어느 황혼녘에 그는 잔다리의 그 연못가로 산보를 나왔다가 순간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다.”(이상섭, ‘윤동주 자세히 읽기’)

잔다리 연못가로 윤동주가 산보 갔다는 확실한 증언은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다. 옛날 연희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렸던 개울이 지금의 서교동 일대에 여러 갈래로 흘러내렸고, 거기에는 많은 작은 다리가 놓여 마을 이름이 ‘잔다리 마을’로 불려 왔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의통방 세교리계, 현재 마포구 동교동의 창천에 있던 작은 다리 ‘잔다리’, 한자로 고친 것이 세교(細橋)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자주 오랫동안 먼 길을 걷곤 했다는 윤동주, 들녘이었던 홍익대 앞 어디쯤을 거닐었을까. 1938년 그가 마주했던 호수는 그 무렵 그가 보았던 ‘해바라기 얼굴’의 여성 노동자나, ‘슬픈 족속’의 흰옷을 입은 한민족이라는 거대한 호수였을 수도 있겠다. 시 원본 끝에 ‘모욕을 참어라’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그에게 어떤 굴욕적 사건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적었을까. 이 메모와 함께 생각해볼 때, 어찌할 수 없는 자신과 민족의 운명 앞에 ‘나를 불러내소서’라는 다짐은 서늘하다. 물이 흐르던 시내는 복개되어 찾을 수는 없으나, 홍익대 근처에 가면 낮고 고독한 고백이 가슴속에 우직하다. 나를 불러내소서.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