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대표팀 선수들이 7일 러시아와의 평가전에서 2-4로 패한 뒤 고개를 떨구고 있다.
안영식 전문기자
게다가 러시아 월드컵 본선 조 추첨 방식은 종전 ‘대륙별 포트 배분’에서 ‘FIFA 랭킹 포트 배분’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최하위 8개국 그룹인 4번 포트(pot) 배정이 사실상 확정됐다. 그 기준은 바로 최근 발표된 ‘FIFA 10월 랭킹’이기 때문이다.
본선 진출을 확정했거나 가능성 있는 국가 중 한국보다 랭킹이 낮은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63위)와 러시아(65위), 온두라스(69위), 뉴질랜드(122위) 등 4개국뿐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개최국 어드밴티지로 FIFA 랭킹 1∼7위인 독일, 브라질,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벨기에, 폴란드, 프랑스 등과 함께 이미 1번 포트에 배정됐다.
12월 본선 조 추첨에서는 32개 본선 출전국을 랭킹 순으로 8팀씩 묶은 1∼4번 포트에서 한 팀씩 뽑아 4팀씩 8개 조를 편성한다. 4번 포트인 한국이 속한 조의 나머지 3팀은 1∼3번 포트에서 한 팀씩 오게 된다. 최악의 경우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나머지 3팀의 ‘1승 제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고3 수험생에 비유하면 내신등급을 깔아주는 꼴이다.
그런데 한국이 속한 조에 1번 포트에서 러시아가 뽑히는 게 과연 최상의 조 편성일까. FIFA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면, 개최국 러시아는 ‘랭킹은 숫자에 불과한 강팀’이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한국은 7일 평가전에서 러시아에 2-4로 패하며 자신감까지 잃은 상황이다.
물론 하위 랭커도 강팀을 잡을 수 있다. 축구가 특히 그렇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이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연파하고 4강에 오를지 누가 예상했겠는가. 하지만 그 당시 한국대표팀에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게 있다. 간절함이다. 한국대표팀의 올해 A매치(1승 3무 4패)에서는 투혼을 느낄 수 없다. 승패를 떠나 축구팬들이 분노하고 있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대비되는 것이 ‘국민타자’ 이승엽(41·삼성)의 은퇴 경기였다. 이승엽은 3일 넥센과의 프로야구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듯 연타석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 카피는 스포츠의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그 말이 어울리는 스포츠 선수는 가물에 콩 나듯 찾기 어렵다. 운동선수에게 나이는 뛰어넘기 힘든 장벽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승엽은 그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통산 홈런왕(467개)다운 드라마틱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승부의 세계에서 간절함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골프에서 박인비의 금메달 획득이다. 그는 대회 개막 한 달 전까지도 손가락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 올림픽 출전 자체가 불투명했다. 마음고생도 심했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올림픽에 왜 출전하려고 하느냐” “후배를 위해 출전권을 양보하라”는 누리꾼들의 악성 댓글이 쏟아졌다.
리우 올림픽 골프 출전 자격 기준은 세계랭킹이었다. 세계 15위까지는 자동 출전권이 부여됐는데, 국가당 4명까지로 제한했다. 당시 한국은 15위 이내에 무려 7명이나 있었다. 랭킹 순으로 박인비(3위)와 김세영(5위) 양희영(6위) 전인지(8위)가 출전권을 확보한 상태였고, 장하나(10위)와 유소연(12위) 이보미(14위)는 대기 선수였다.
만약 박인비가 불참했다면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올림픽 금메달+4개 메이저 우승)’이라는 신조어는 불필요했을 것이다. 한국 야구와 세계 골프의 역사로 남을 이승엽과 박인비가 이룬 업적의 밑바탕은 남다른 간절함이었다.
116년 만에 부활한 올림픽 골프 정상에 오른 박인비는 “2라운드를 끝낸 피로도가 일주일 내내 공을 친 것과 비슷했다. 최종 4라운드를 마치고 나니 몸에 남은 에너지가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할 태극전사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다.
안영식 전문기자 ysa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