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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치지 않는 자의 골프 이야기] ‘캐디없는 골프’ 어때요?

입력 | 2017-10-26 10:16:00


김효주 선수와 그의 캐디. 동아일보 DB


올해 7월 지역구 수해 중 해외연수를 떠난 것도 모자라 국민을 들쥐 ‘레밍(Lemming)’에 비유해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김학철 충북도의원. 그보다 앞서 한국인에게 ‘레밍’이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1980년 대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재직한 존 위컴(89)이다.

위컴 사령관은 1980년 “한국인들은 레밍과 같이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 그에게 우르르 몰려든다. 전두환이 곧 한국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레밍 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는 말로 유명해졌다.


전 전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1980년 대 암묵적 방송 출연 금지를 당했던 배우 박용식 씨. 그가 전 전 대통령으로 분해 열연을 펼친 1990년 대 MBC 드라마 ‘제4 공화국’에도 위컴 사령관이 등장한다.

전 전 대통령이 집권 전 서울 용산구 미 8군 기지 내 골프장에서 도처에 경호원을 배치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골프를 친다. 다른 홀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 미국인이 동반자에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저 사람이 누구기에 저런 황제 골프를 치느냐”고 묻는다. 그가 바로 위컴이다.

존 위컴 전 주한미군사령관. 출처 위키피디아



필자는 1980년 대 초 용산 미 8군 기지에서 카투사로 복무했다. 한동안 수송대가 있는 모터풀(Motor Pool)이란 곳에 매일 사무실에서 쓸 차를 배차 받는 임무를 맡았다. 차를 몰고 사우스 포스트(South Post)라는 곳을 지나다 매일 아침 열을 지어 기지에 들어오는 젊은 여성들과 마주쳤다. 어림잡아도 100명은 넘어 보였다. 군무원으로 보이지도 않고 사무실도 거의 없는 지역이기에 의아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의 정체를 알았다. 기지 안 골프장의 캐디였다. 지금보다 골프를 더 몰랐던 20대 초반의 필자는 대체 왜 그 많은 캐디가 필요한 지 궁금했다. 당시 골프는 정말 극소수의 사람만이 즐기던 운동이었고 주변 미군 중 골프 치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아버지 친구 분 중 중견기업을 운영하며 골프를 치는 분이 계셔서 여쭤봤다. “미군들은 골프를 자주 안 치던데 왜 이 많은 캐디가 매일 기지에 들어올까요? 특히 평일에는 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말이죠.” 그 분의 답이다. “기지 안에 있다고 미군만 골프를 치나. 오히려 한국인을 위한 골프장이라네.”

당시 한국 권력자들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이 골프장을 애용했다. 여기서 골프를 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어마어마한 특권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골프장은 1991년 한국으로 반환됐고 현재의 ‘용산가족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출처 픽사베이



이처럼 한국에서의 골프는 뿌리 깊은 접대(接待) 문화나 권력자의 과시용 목적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골프 대중화가 많이 이뤄진 지금도 소위 지도층 인사라는 이들이 캐디를 상대로 벌이는 갖가지 ‘갑질’이 잊을 만하면 언론지상을 장식한다.

지난 칼럼에서도 다룬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행태는 고전(?)에 속하므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들만이 ‘갑질’을 자행하는 건 아니다. 필자의 상사와 동료, 거래처 상대방 중에서도 캐디를 향한 성적 농담을 일삼은 이가 있다. 일부는 성추행에 가까운 행동을 하면서 이를 무용담처럼 포장해 자랑하기도 했다.

그들의 평소 언행이나 이력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평소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들이 왜 골프장에서는 이런 안하무인 행동을 할까. 평소 일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왜 골프장에 오면 흐트러질까. 캐디 또한 엄연히 직업인인데 말이다.

고용부가 2016년 펴낸 한국직업사전은 캐디의 ‘수행 직무’를 이렇게 규정한다. “고객의 골프백을 카트에 싣고 경기 중인 고객을 따라다니며 용도에 맞는 골프채를 건네준다. 코스의 특징을 설명한다. 공을 칠 방향 및 거리에 대하여 조언한다. 흙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며 경기로 인해 손상된 잔디 위에 붓고 다진다. 골프공 또는 골프채의 이물질을 털어준다. 경기 전·후에 골프채의 개수를 확인하여 기록한다.”

이 직무 어디에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성적 농담과 신체 접촉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기업으로 치면 캐디는 재료 공급, 자문, 생산시설과 창고 관리, 마감까지의 업무를 각 사이클 모두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 본연의 역할에 맞춰 골퍼와 캐디가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맺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골프 문화도 진일보하고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갑질’도 빨리 사라질 것이다.



최근 한 지인은 필자에게 ‘No 캐디 골프’가 늘고 있다고 알려줬다. “캐디가 골프채를 뽑아주고 닦아주고, 다음 목표까지 남은 거리와 쳐야 할 방향을 일일이 알려주고 전동 카트까지 운전해주는데 이게 무슨 운동이야. 그냥 캐디의 로봇에 가깝지. 물론 상당수 로봇은 캐디의 말도 잘 안 듣고 치라는 대로 치지도 않지만 말이야.”

지인의 말에 따르면 ‘캐디 없는 골프’는 여러 이점이 있다. 우선 골퍼들이 캐디가 있을 때보다 확실히 많이 움직여야 하므로 몸을 쓴다는 스포츠의 본질에 충실해진다. 둘째, 현금으로 지급하는 캐디피 부담이 줄어 골프장을 더 자주 찾을 수 있다. 셋째, 골프장 수 급증으로 경영난에 시달리는 상당수 골프장들도 캐디 관련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고위층 인사의 잇따른 캐디 성추행 등으로 추락한 골프에 대한 국민들의 이미지 개선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캐디 동반 유무에 관계없이 ‘신사의 스포츠’라는 골프의 본질에 맞게 많은 골퍼들이 품위를 지키며 운동을 하시길 바란다. 비록 내 자신이 골프장에서 캐디를 쓰는 일은 없겠지만, 내 인생에서는 캐디와 같은 존재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



박재항 하바스코리아 전략부문 대표 parkjaehang@gmail.com

::필자는?::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연구소장, 이노션 마케팅본부장, 현대차그룹 글로벌경영연구소 미래연구실장, 기아차 마케팅전략실장 등을 역임한 브랜드·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현재 프랑스계 다국적 마케팅기업 하바스코리아의 전략부문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저서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 ‘브랜드마인드’, 역서 ‘할리데이비슨, 브랜드 로드 킹’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