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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34>사랑은, 포도가 와인이 되는 것

입력 | 2017-10-28 03:00:00


김용석 철학자

가을이 깊었습니다. 연인들의 사랑도 깊어갑니다.

사랑의 의미는 지금 막 사랑에 빠져 황홀해진 연인들에게나, 가을바람처럼 시나브로 스며들어 열병을 앓게 하고는 홀연히 떠나버린 사랑을 추억하는 연인들에게나 모두 소중합니다. 사랑을 이어 가야 하고, 다시 또 사랑해야 하니까요.

연인 사이의 사랑이 특별한 것은, 서로 ‘사랑하기’ 이전에 ‘사랑에 빠지기’라는 단계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모두 사랑이지만 사랑하기와 사랑에 빠지기는 전혀 다르죠. 서양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 건 ‘벼락에 한 방 맞은’ 것처럼 온다고 표현합니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은 사랑에 빠진 상태에 있는 겁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배타적이 됩니다. 서로에게만 아낌없이 주는 사이가 되며, 단둘이 우주로까지 방랑의 길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우주를 단 하나의 인간으로 환원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둘 사이의 이런 관계는 자신들의 의지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며 오래 지속되지도 않습니다. 쇼펜하우어도 간파했듯이 둘은 서로 자신의 의지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연과 생명의 의지에 따를 뿐이라는 거지요. 요즘은 과학적 설명도 합니다만 혼신의 에너지를 투척하는 활동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건 상식이기도 합니다.

사랑에 빠지기는 그 단계에서 종결돼 이별을 겪거나 그 단계를 넘어서 일상적 사랑하기로 옮겨갑니다. 사랑하기로의 전이는 뜨겁지는 않지만 서로 따스한 보살핌으로 일상의 시공간을 채우며 이루어집니다. 이때 사랑하기는 관심 이해 배려 위로 존중 성실 같은 삶의 다른 덕목들을 포함하게 되지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묻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실 묻는 게 아니라 물음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지요. 그 말은 맞습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수백만 년 전부터 제자리에 있어 왔습니다. 사람이 변할 뿐이지요. “사람이 어떻게 안 변하니?”라고 묻는 것이 현실적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이 변해야 사랑이 변치 않고 지속된다는 역설 말입니다.

찰스 다윈은 유명한 언어학자가 인간의 언어를 술 빚기(brewing)와 빵 굽기(baking)에 비유한 것을 비판했습니다. 말을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의 옹알거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말하려는 본능적 성향’을 갖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앞의 두 기술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은 글쓰기(writing)라고 했습니다.

다윈은 본능이 아니라 노력으로 이루어내는 대표적인 것으로 술 빚기, 빵 굽기, 글쓰기를 든 셈이죠. 이 세 가지 활동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발효와 숙성입니다. 이들은 자연적으로 되는 게 아니라 연습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애를 써서 이뤄내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붙이고 싶습니다. 바로 사랑하기입니다. 사랑에 빠지기가 말하기처럼 본능적 성향의 표출이라면, 사랑하기는 글쓰기처럼 애를 써서 이루어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익어 가면 사랑도 익어 갑니다. 일상의 연인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사랑을 숙성시키는 것입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술과 빵과 글처럼 말입니다. 사랑에 빠지기는 더없이 기쁘고 황홀한 일입니다. 사랑하기는 아주 기분 좋은 일입니다. 잘 빚어진 술과 잘 구워진 빵을 먹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봄의 연인들은 사랑에 빠집니다. 밤하늘에 계절이 지나가고 가을의 연인들은 사랑하기를 다짐합니다.

김용석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