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채널A 공동취재]下放 생활하던 산골 량자허 르포
시주석 살던 집에 관광객 북적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5세 때 하방돼 생활했던 산시성 옌안시 산골마을 량자허의 토굴집은 시 주석 우상화를 위한 혁명관광지가 됐다. 토굴집 내부에 시 주석의 젊은 시절 흑백사진과 마오쩌둥의 컬러 그림이 나란히 붙어 있다(위쪽 사진). 마오쩌둥 그림 밑에 ‘마오쩌둥 만세! 만만세!’라는 글도 보인다. 기자가 찾아간 27일에도 많은 중국인들이 토굴집을 찾아 시 주석의 당시 잠자리를 둘러보고 있다. 량자허=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
10m2 남짓한 토굴집으로 더 들어가자 시 주석의 젊은 시절 흑백사진을 확대해 액자에 끼워 놓은 사진이 맞은편에 걸려 있었다. 고개를 돌려 더 안쪽을 보니 ‘마오쩌둥 만세! 만만세!’라는 글 위에 그려진 마오쩌둥의 그림이 시 주석 사진과 불과 1m 떨어진 같은 벽에 붙어 있었다.
3일 전인 24일 시 주석은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시진핑 신(新)시대 중국 특색사회주의 사상’을 공산당 당 헌장에 삽입했다. 이름이 포함된 사상 삽입은 마오쩌둥에 이어 두 번째다. 27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최고지도부인 상무위원들도 시 주석에게 업무보고를 해야 하도록 규정을 바꿨다고 보도했다. 덩샤오핑(鄧小平) 이후의 집단지도체제가 마오쩌둥 시절의 1인지배체제로 되돌아감을 공식화한 날 나란히 붙은 시 주석과 마오쩌둥의 사진은 묘한 풍경을 자아냈다. 토굴을 찾은 중국인들은 두 지도자를 번갈아 보며 사진을 찍었다.
시 주석 첫 집권 5년 전만 해도 토굴 내부가 공개되지 않았던 이곳은 이제 하루에 수천 명이 찾는 홍색(혁명) 성지가 돼 시 주석을 우상화하고 있었다. 베이징(北京)에서 비행기로 1시간 반가량 떨어진 옌안 시. 이곳에서 다시 차를 타고 1시간 반 정도 고속도로를 달리자 량자허가 나왔다. 차량 기사는 “2년 전에 옌안시에서 량자허를 지나는 고속도로가 뚫렸다”며 “시 주석이 지도자가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일”이라고 말했다. 시 주석은 2015년 2월 량자허를 다시 찾았다. 량자허 앞에 도착하니 매표소에서 20위안(약 3400원)짜리 전동셔틀버스 티켓을 사야 했다. 버스를 타고 5분여를 달리자 량자허에 도착했다. ‘량자허의 변화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 발전의 축소판’이라는 시 주석의 발언이 붉은 대형 현수막에 걸려 있었다.
가이드들은 “시 총서기가 마을 주민들의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인솔해 깊은 우물을 팠다. 여전히 량자허의 음용 수원이다” “1974년 량자허 지부 서기이던 시 총서기가 산시성에서 처음으로 메탄가스 시설을 도입해 취사와 조명 등의 문제를 해결했다”며 시 주석의 업적을 찬양했다. 메탄가스 시설 앞에는 젊은 시절의 시 주석이 메탄가스 시설 계획서를 들고 펜을 쥔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키며 농민들을 이끄는 우상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벽화 양옆에 당시 시 주석이 드높인 정신이라는 ‘간고(艱苦) 속에 분투하자. 자력갱생’이 붉은색으로 도드라졌다.
량자허는 시 주석이 생활한 토굴집 등을 화려하게 복원하지는 않았다. 인민과 함께하는 서민적인 지도자를 선전하기 위한 의도로 보였다. 시 주석이 생활했던 토굴집은 참관객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 지역 공안 관계자는 “하루 평균 1만5000명이 왔다”고 했지만 최근 중국 매체에 따르면 지난해 한 해에만 92만 명이 왔다. 매일 2500여 명이 온 셈이다. 이날도 공산당 각 기층 지부 등에서 단체로 관람 온 중국인이 많았다.
왕링샤오(王凌曉·59) 씨는 “시 주석이 어려움 속에서 의지를 연마한 경험이 훗날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바꿨음을 알았다”고 말했다. 천량(陳亮) 씨는 “매우 큰 깨우침을 얻었다. 혁명성을 매우 강조하는 다른 혁명교육과 달리 이곳은 매우 서민적”이라고 말했다. 현지 공안은 취재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파출소에 신분증 제시와 등록을 요구한 뒤 취재 내내 공안 관계자로 보이는 3명이 거리를 두고 취재진을 따라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