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말기 美 한국과장 방한 全 만나자 정부·국회 요인 줄서… 위 단추 잘못 채우면 아래 단추도… 文 정부 반년, 대통령 과거 집착 아랫사람 ‘오버’로 정치 보복… 수사 종착역 ‘MB 욕보이기’인가 질서 있었기에 힘 있었던 촛불… 누굴 공격하는 횃불과는 달라
박제균 논설실장
대통령이 과장을 만나고 나니, 정부와 국회의 요인들이 블랙모어를 만나려고 줄을 섰다. 외교 의전을 아는 외무부에선 국장이 만나려고 했으나 “대통령을 능멸하는 거냐”는 ‘상부’의 압박에 결국 차관이 만나야 했다.
돌아보면 얼굴이 후끈할 정도의 과공(過恭)이요, 사대주의다. 지금이야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크게 나아진 것도 없다. 국무총리를 지낸 주미대사가 미 국무부의 동아태차관보 정도를 만난다. 중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것이 우리의 능력과 처지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대통령과 과장의 만남은 너무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교훈 한 가지. 위 단추를 잘못 채우면 아래 단추까지 계속 잘못 채우게 된다는 것이다.
‘적폐청산’ 구호나 검찰 국가정보원 개혁 프로그램도 급조된 것이 아니라 수년간 묵히면서 논의를 진전시켜 온 데 따른 것이다. 서훈 국정원장이 국내 정보 파트의 핵심 부서인 정보보안국과 정보분석국을 폐지한 것도 이미 준비된 개혁 프로그램에 들어 있었다. 남북관계와 관련해선 가능한 한 연내에, 안 되면 집권 1년 내에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2007년의 10·4선언을 복원하고 임기 내 한반도 평화체제를 정착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범 반년이 다 된 지금, 뭔가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선 남북관계부터 예상과는 크게 빗나갔다. 서른세 살의 김정은은 놀라운 속도로 수소폭탄을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완성 단계에 다다랐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박 국면에 한국만 발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다. 더구나 김정은은 문 대통령을 대화 상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대로라면 김정은은 핵보유국의 자격으로 미국과 ‘빅딜’을 한 뒤 돈이 필요하면 남쪽을 바라볼 것이다.
외부의 큰 그림이 깨지면서 문 대통령은 내부로 빠져드는 모습이다. 여권에서도 걱정이 나올 정도로 ‘적폐청산’에 집착하는 것은 조급증의 발로는 아닐까. 문제는 대통령이 이렇게 위 단추를 채우면서 아래 단추들이 계속 잘못 채워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윗사람의 집착은 아랫사람에게 엄청난 압력으로 작용하고, 때론 ‘오버’로 나타난다. 급기야 문 대통령의 ‘잘 드는 칼’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입에서 이명박(MB) 전 대통령 실소유주 논란이 있는 자동차부품업체 다스의 실제 소유주가 누군지 확인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지난 대선도 아니고 지지난 대선, 10년 전 쟁점까지 까뒤집겠다는 건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정치 보복’ 이외의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현 여권 내에 윤석열의 오버를 제어할 만한 정치의 순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수 수사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심재륜 전 부산고검장은 “칼은 찌르되 비틀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수사를 하더라도 불필요한 인격 모독이나 압박용 계좌추적, 별건(別件)수사 등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MB 청와대와 국정원의 여론 조작은 수사하되, 그 종착역을 ‘MB 욕보이기’로 정해 놓고 몰아가선 안 된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