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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동아/10월 31일]존슨 美 대통령 방한, 최고 예우 대접…왜?

입력 | 2017-10-30 18:28:00


서울을 찾아 환영 인파에게 답례하고 있는 린든 존슨 제36대 대통령. 출처 LBJ(린든 B 존슨) 라이브러리


부대찌개 종류 중 ‘존슨탕’이라는 게 있다. 음식 대부분이 그렇듯 100% 정확한 유래는 알기 힘들지만 1966년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재임 1963~69) 방한과 관계가 있다는 데 많은 학자가 동의하고 있다. 또 경기 화성 시 송산동의 ‘존슨 동산’ 역시 이 대통령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트 대통령이 다음달 11일 방한하면 한국은 찾은 역대 11번째 미국 대통령이 된다. 이들 중 이런 식으로 자기 이름을 남기고 간 인물은 존슨 대통령이 유일하다. 51년 전 오늘(1966년 10월 31일) 방한한 그가 한국 땅을 밟고 있던 45시간 동안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존슨 대통령 방한 소식을 전한 1966년 10월 31일자 동아일보



● 백악관의 쌀밥과 김치 그리고 베트남 파병

존슨 대통령은 1961년부터 존 F 케네디(JFK)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내다 1963년 JFK가 암살당하면서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았다. (1964년 대선에선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대통령이 됐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기 때문. 그 중 하나가 베트남 전쟁이었다.

JFK 암살 이후 미국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존슨 당시 부통령(오른손 든 사람). 동아일보DB


때마침 태평양 건너편에 이 전쟁을 경제 발전 토대를 마련하려는 나라가 있었다. 맞다. 바로 한국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이런 관계는 마음이 변하기 전에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정을 나눠야 ‘비즈니스’가 성사되는 법.

존슨 대통령은 1965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명분은 5·16군사정변 4주년. 존슨 대통령은 에어포스원을 한국으로 보내 박 대통령이 타고 오도록 했으며 워싱턴 중심가에서 카 퍼레이드까지 열어줬다.

박정희 대통령 방미 분위기를 전한 1965년 5월 18일 동아일보 사진 기사 등.



나중에 공개된 백악관 문서에 따르면 존슨 대통령은 당시 정부 기관에 ‘빈틈없이’, ‘거창하게’ 박 대통령 환영 절차를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또 각 신문에 박 대통령에 대한 기사를 크게 취급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백악관에는 쌀밥과 김치를 준비했고, 환영만찬장에서는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1965년 5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당시 워싱턴을 떠나면서 “여기에 오기 전에 나는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한국 노력에, 또 공산 침략에 대항하여 자유를 수호키 위한 우리의 투쟁에 미국이 얼마나 관심과 이해를 가졌는지 의심했지만, 이제 나의 이 두 가지 의구(심)는 해소됐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방미 소감을 전한 1965년 5월 20일자 동아일보



이후 한국에서 베트남 파병은 가속도를 냈다. 한국이 처음 베트남 전쟁에 파병한 건 1964년이지만 박 대통령 미국 방문 전까지는 의무(醫務)·건설지원단 등 비전투부대만 사이공(당시 남베트남 수도)을 찾았다. 국회가 전투부대(청룡부대) 파병 동의안을 가결시킨 건 1965년 8월 13일이었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는 여당(공화당)만이 단독으로 참석했다.

 
● “한국엔 반미주의자가 한 명도 없다.”


이듬해 10월 존슨 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7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인기 없는 전쟁을 수행 중인 미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에서 환영받기는 쉽지 않은 일. 존슨 대통령은 가는 나라마다 ‘어제는 죄 없는 아이를 몇 명이나 죽였나?’, ‘존슨 고 홈(Go Home)’이라고 외치는 시위대와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 방문지였던 한국은 완전 딴판이었다.

1966년 10월 31일자 동아일보는 “존슨 대통령은 곧 박대통령과 검은 리무진차에 동승, 연도를 뒤덮은 180만을 훨씬 넘는 환영인파와 태극기 및 성조기 물결을 헤치며 서울로 들어왔다. 오후 4시 50분. 서울시청 앞 관장에 이른 존슨 대통령은 그곳에서 열린 ‘시민환영대회’에 참석. 수십 만 명이 참석한 대회… 존슨 대통령은 환영대회가 끝난 뒤 박 대통령과 함께 무개차(無蓋車·오픈카)를 타고 중앙청까지 퍼레이드”라고 전했다.

출처 LBJ 라이브러리 트위터



다음날 동아일보는 존슨 대통령 일행이 이 환영행사에 무척 흐뭇해했다고 전했다. “빌 모어스 백악관 대변인은 ‘가장 크고 가장 성대하며 가장 열렬한 환영이었다’고 ‘가장’이란 최상급 수식어를 세 번씩이나 썼다”고 한다.

존슨 대통령 방한 첫날 분위기를 전한 1996년 11월 1일자 동아일보 사진 기사



열렬한 환영 분위기는 미국 기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 홍종철 공보부 장관이 개최한 리셉션에서 미국 기자들은 “다른 나라처럼 데모도 없고 ‘존슨 고 홈’의 아우성이 없어 이상하다”고 노석찬 공보부 차관에게 물었다. 노 차관은 “한국엔 반미주의자가 단 한 사람도 없어서 그렇다”고 답했다.
 

● 낮의 외교, 밤의 외교

존슨 대통령은 방문 이틀째였던 그해 11월 1일에는 경기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현 화성시 안녕동)을 방문했다. 당시 동아일보 표현을 인용하면 이 마을은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이룩한 ‘모범 부락’”이었다. 당시 태안면사무소는 존슨 대통령이 면 전체를 잘 굽어볼 수 있도록 전망대를 만들고 그 자리에 존슨동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터넷 캡처



이 자리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쓴 ‘농군 대표’ 최시중 할아버지(당시 65)도 나와 있었다. 최 할아버지를 보자 존슨 대통령은 성큼 다가가 손을 내밀고 기념촬영을 했다.

기념촬영을 마친 존슨 대통령을 최 할아버지에게 “미국에 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최 할아버지는 긴 턱 수염을 쓸어내리며 “한번쯤 가보고 싶지만 오늘은 안 되겠다”며 웃었다. 그러자 존슨 대통령은 대신 최 할아버지에게 헬리콥터 10분 비행을 선물했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왼쪽)과 최시중 할아버지. 미국 시사지 ‘라이프’ 캡처



이렇게 훈훈한 이야기에 ‘야화(夜話·밤 이야기)’가 빠지면 섭섭한 일. 이동원 당시 외무부 장관이 1992년 펴낸 책 ‘대통령을 그리며’에 따르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부대통령 자격으로 처음 만난 1961년부터 인연을 이어온 두 대통령은 ‘EDPS(음담패설)’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방한 때 존슨 대통령이 이 장관을 칭찬하자 박 대통령은 “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의 외교는 더욱 능숙하다”고 대답했다. 이에 붙임성 좋기로 유명한 이 장관이 존슨 대통령에게 ‘기생 파티(!)’를 제안했다. 존슨 대통령이 숙소로 쓰던 워커힐 호텔 별채에서 방한 마지막 날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제안한 것. 존슨 대통령도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영부인 버드 여사가 눈치를 채는 바람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이 장관은 회고했다.


●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


이렇게 존슨 대통령을 맞이한 이들 중 다수가 ‘동원 인력’이었다는 걸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자료에 따라서는 275만 명을 동원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 참고로 당시 서울 인구는 350만 명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원조해주지 않으면 먹고 살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당시 한국에서 미국 대통령의 위상은 지금하고는 또 달랐다. 당시라고 한국에 반미주의자가 단 한명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미국 대통령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슈퍼스타’였던 것도 사실이었을 터다.

김포공항에서 서울시내로 가던 도중 환영 인파에게 인사하는 존슨 미국 대통령(가운데)과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왼쪽). 동아일보DB



이 원조를 공짜로 얻어낸 건 물론 아니었다. 대통령 기록관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1965년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에 파병한 한국군 2000명이 미국 의회에서 원조안을 통과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한국에게는 미국이 필요했고, 미국 역시 한국이 필요했다. 아니, 존슨 대통령에게는 박 대통령이 필요했고, 박 대통령 역시 존슨 대통령이 필요했다. 하나를 받으려면 하나를 줘야 했다.

2005년 공개된 ‘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른 미국의 대한(對韓) 협조에 관한 주한 미대사 공한’(일명 브라운 각서)에 따르면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시작한 1973년까지 파병 장병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총 1억9511만 달러에 달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깔았고, 한국 기업 역시 군수물자 납품 등으로 특수(特需)를 누렸다. KAIST가 문을 열게 된 것도 이 두 대통령의 우정(?) 덕분이었다.

1973년 1월 30일 경기 수원 시 공군기지에 도착한 철군 선발대. 동아일보DB



물론 베트남 전쟁 파병이 100%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파월 장병들이 이 전쟁에서 손에 피를 묻힌 덕에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도약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1964년 103달러였던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74년 541달러로 5배 이상 올랐다.

과연 이번 트럼프 대통령 방한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얻게 될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