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4개월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이 26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 시행령 중 상한액을 규정한 이른바 ‘3·5·10’ 조항에 대해 “필요하면 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하지만 서민들은 ‘한 끼에 3만 원이나 하는 식사도 부족해서 더 올리겠다는 건가’라며 반발한다. 특정 부처나 농축수산업 등 특정 업종 여론에 밀려 법 시행 1년이 조금 지나 시행령에 손을 대면 법 제정 취지가 훼손될 것이란 우려도 있다. 실제로 국민 89.2%는 이 법을 지지한다는 최근 여론조사(한국행정연구원-한국리서치 일반 국민 1000명 대상 설문조사 결과)도 나왔다. 취임 4개월을 맞은 박 위원장은 ‘3·5·10’ 가액 조정의 기로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권익위는 청탁금지법 발의 부처로 가액 조정 등 시행령 개정 권한을 갖고 있다. 박 위원장을 26일 권익위 서울종합민원사무소에서 만났다.
“농축수산가, 화훼농가 등 이 법 영향업종의 매출 감소와 소비 위축 등 피해에 대해선 법 소관 부처로서 안타까움 느끼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국민 다수는 이 법의 안정적인 유지를 바라고 있다. 식사, 선물 등의 적정액이 얼마인가는 2+2=4처럼 정답이 없다. 3만 원짜리 식사를 하면 청렴하고, 5만 원이면 덜 청렴한 건 아니다. 정확한 답은 없지만 더 나은 답을 찾기 위해 시행령에 ‘2018년 12월 31일까지 상한액(가액)의 타당성을 재검토해 상향 조정 등의 조치를 한다’고 해놓은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년 12월까지 끌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이 법은 사회적 지지를 받고 있고, 부정적·긍정적인 측면이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기에 개정하는 경우라도 정말 신중해야 한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진행 중인 법 시행의 경제·사회적 영향에 관한 연구 결과를 올해 11, 12월 대국민 보고를 할 것이다. 이를 토대로 법 시행령 보완 방안을 마련하겠다. 필요하면 가액 조정까지도 검토하겠다는 뜻이다.”
―농축수산물만이라도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특정 품목에만 예외를 둔다면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것이고, 추가적인 예외 요구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농축수산물을 예외로 한다고 해서 법 시행에 따른 부작용이 대폭 줄어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농축수산가나 화훼농가가 처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권익위 차원의 대처만이 아니라 관계부처 등 범정부적 차원에서의 대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권익위는 청탁금지법 소관부처로서 시행령상의 보완책을 강구하겠지만 전체적인 내수 부진 문제는 이 법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이 법이 (내수 부진의) 알리바이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법 시행과 농축수산업계, 화훼업계 등의 매출 감소 간의 인과관계가 증명될 수 있을까.
“법 시행에 따른 농축수산가의 피해가 딱 떨어지는 수치로 나오는 건 어렵다고 본다. 일부 업종의 매출 감소에는 부동산 경기 하락, 정치적인 불확실성, 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불확실성 증대 등 다른 요인도 작용했을 것이다. 최근 한국은행도 ‘법 시행 이후 고급 음식점에서의 법인카드 사용이 감소했다. 하지만 동시에 소비심리 변화 등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기에 법 시행 파급효과만을 구분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인과관계 증명이 어려운데도 가액을 앞당겨 상향 조정한다면 권익위가 일부 비판 여론을 의식해 정무적 판단을 했다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다.
―법 적용이 공직자 등으로 한정되는데도 법 내용을 잘 몰라 일부 민간인도 3만 원 이하 식사를 한다.
“법 시행 초기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손님이 인절미를 미용사에게 주니까 미용사가 ‘김영란법 위반 아니에요?’라고 하더라. 시행 초기 오해가 많았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사회에 그간 부정 청탁 문화, 과도한 접대 문화가 만연해 있었고, 그것에 대해 법 적용 대상이든 아니든 다 함께 반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공직사회에서 3·5·10에 맞춰 더 청렴하게 생활하게 되자 일반 국민들도 이 모습을 따라가고 있다. 사회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다.”
―법 시행 1년이 지났음에도 모호하다는 지적 많다.
“일부 모호성은 인정한다. 어떤 조항들은 예외 조항이 있고, 또 예외의 예외 조항이 있다. 공직자가 직무 관련자에게 금품 받을 수 없다고 해놓고, 직무와 관련되더라도 일정액 이하의 선물은 받을 수 있다고 돼 있다. 법률가들이 볼 땐 논리적으로 해명이 되지만 일반인들은 ‘받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할 것이다. 시간이 더 가면 구체적인 위반·처벌 사례들이 축적되면서 복잡함이 해소될 것이라 생각한다. 법은 일반적인 원칙을 정하는 것이지 무수한 개별 사례까지 일일이 적시해놓고 ‘이건 맞고 이건 틀리다’라고 정하는 건 아니다.”
―‘카네이션법’ ‘캔커피법’으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나도 법 시행 전 교수로 재직할 때 스승의 날에 카네이션 한 송이는 받았다. 법 시행 이후인 지금 어느 교수가 카네이션 한 송이를 받았다고 해서 법을 위반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 법은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정한 직무수행을 위한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카네이션 한 송이가 위법일까 아닐까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과거에 누가 그런 고민을 했겠나. 다만 카네이션에 담을 수 있는 고마움은 편지나 이메일 등 논란이 없는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법학자인데 김영란법처럼 우리 사회를 더 투명하게 하기 위한 ‘박은정법’을 만들 생각은 없나.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 제정을 추진할 것이다. 공직자의 사적 이해관계가 개입돼 공정한 직무수행이 어려울 경우 이를 수행할 수 없게 하는 법이다. 이해충돌방지 조항은 청탁금지법 원안에 포함됐으나 2015년 국회 통과 당시 빠졌다. 청탁금지법이 시행돼 청렴 문화가 확산된 만큼 공직사회도 이제는 이 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 것이다.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돼있는 ‘공공재정 부정청구 등 방지법(일명 부정환수법)’ 제정도 이뤄내겠다. 각종 보조금 등을 허위·과다 청구할 경우 이를 환수하고 최대 5배까지 제재부가금을 부과하는 내용이다. 청탁금지법을 포함한 이 세 가지 법은 반부패 개혁을 국정과제로 내세운 정부라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법이라고 생각한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정확히 어떤 기관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국민권익위는 국가청렴위원회,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 등 3기관을 통합해 (2008년) 출범했다. 부패방지, 민원 등 고충처리, 행정심판, 제도개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한다. 통합 이후 권익위의 정체성이 다소 약화된 부분이 있다. 국정 및 정부운영에 있어 중요한 기능을 수행함에도 그 역할의 중요성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건 사실이다. 청탁금지법도 알고 국민신문고도, 행정심판도 아는데 정작 권익위는 잘 모르더라. 국가인권위원회와 헷갈려하는 분들도 있다. 새정부 국정과제에도 권익위가 반부패 청렴정책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 조직과 기능을 강화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를 위해 조직을 재설계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권익위 명칭을 한 번에 그 역할이 와닿는 이름으로 바꿀 계획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어떤 인연이 있었나.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던 문 대통령이 ‘정부에서 일해줬으면 좋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당시는 내가 이화여대 법대 교수에서 서울대 법대 교수로 옮긴 직후였다. 국립대로 옮길 때 주변에 ‘국민이 주는 돈으로 일하게 됐으니 새로이 출발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연구하겠다’고 말했다. 공직을 준다고 금방 가볍게 말을 바꾸면 되겠나. 정중히 고사했다. 그런데 이번에 대통령께 임명장을 받을 때 날 기억하더라. ‘참여정부 때 모시려 했는데 불발됐다. 이번에 함께 일할 수 있게 돼 반갑다’는 취지로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은…
△이화여대 법학과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법학 박사 △이화여대 법학과 교수 △한국법철학회 회장 △참여연대 공동대표 △한국인권재단 이사장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