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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전공의→ 의대생… 의료계 ‘갑질 카스트’

입력 | 2017-11-01 03:00:00

‘말단’ 학부생 폭력피해 심각




올해 초 부산의 한 대학 의과대에 입학한 A 씨. 그는 의대 내 동아리에 가입했다. 4월 동아리 오리엔테이션을 앞두고 1년 선배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동아리 신입회원 모두에게 보낸 것이었다. 제목은 ‘13가지 신입생 숙지사항’. 내용은 ‘자기소개 때 성적(性的)인 내용을 발표해야 한다’ ‘사발식에서는 1인당 15모금씩 술을 마셔야 한다’ 등이다. ‘제대로 숙지하지 않으면 각오하라’는 협박성 충고도 있었다.

메시지는 현실이 됐다. 오리엔테이션에서 신입생들은 선배 수십 명 앞에서 자신이 상상하는 성적 행위를 상세히 설명했다. 머뭇거리는 신입생에게 “저 ××, 뭐냐”는 욕설이 쏟아졌다. 남학생 간 성행위를 연기하는 ‘성인용 콩트’까지 했다. A 씨는 “의료봉사를 하려고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수치심만 느낀다”면서도 “학교생활을 버티고 이 분야에서 살아남으려면 선배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최근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를 상대로 한 일부 의대 교수의 갑질이 논란이다. 하지만 이는 교수와 전공의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의대생(예과생, 본과생)은 교수뿐만 아니라 전공의 앞에서도 항상 을이다. 교수-전공의-의대생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먹이사슬을 연상케 한다. 마치 인도의 카스트(계급제도)처럼 쉽사리 바뀌지도 않는다.

현장에서 만난 일부 의대생은 학교 분위기가 ‘조폭 문화’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경북지역의 한 의대 신입생 B 씨는 시내에서 우연히 만난 선배에게 90도로 고개 숙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욕설을 들었다. 개인 약속도 함부로 잡을 수 없다. 약속이 겹칠 경우 우선순위는 교수, OB(선배), 동문회, 동아리 순이다. 동아리 탈퇴는 하늘의 별 따기다. B 씨는 “‘탈동(탈동아리)’했다간 왕따를 당할 수 있다”고 하소연했다.

전공의는 교수 앞에서 ‘을’이지만 의대생에겐 ‘갑’이다. 그리고 교수에게 당한 갑질을 대물림한다. 의대생에게 실습은 공포의 시간이다. 학생들에게 불만을 품은 전공의가 유리 기구를 벽에 던지거나 수술용 칼을 실습생에게 던지는 행위까지 벌어진다. 한 실습생은 “얼굴에 맞을까 불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며 “학교 측도 전공의의 행동을 모르는 척 넘어가니 어쩔 도리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옵저베이션(observation·관찰)’ 관행도 유명하다. 전공의가 하는 의료 행위를 학생들이 정자세로 관찰하는 걸 말한다. 병풍으로도 불린다. 길게는 4시간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전공의의 욕설이 쏟아진다. 목이 말라도 정수기 물을 마실 수 없다. 정해진 시간에 화장실 ‘세면대 물’만 마실 수 있다. 학기마다 학생 여러 명이 쓰러진다.

하지만 의대생들은 쉽게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전공의는 의대생 평가를 교수에게 위임받아 유급 여부까지 결정한다. 교수는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전공의들의 권력을 눈감아주기도 한다. 학교 측도 병원 평판에 신경 쓰느라 사건을 덮는 데 급급하다. 한 의대생은 “2년 전 한 여학생이 성추행을 당한 일이 공론화됐는데, 학교 측은 내부 고발자 색출에만 골몰했다”며 “경찰 신고라도 했다간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에 전공의뿐만 아니라 의대생을 법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는 11월 중순까지 의대생 갑질 피해사례를 접수하고 있다. 의대협 류환 회장은 “전공의가 폭행을 당하면 전공의 선발 인원 감축 등 보호 장치를 만들지만 의대생은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며 “병원에도 실습생을 위한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이 없어 각종 부조리에 취약한 상황이다”고 말했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