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청주 신봉동 유적 조사된 300여기 무덤들 중 무기-마구 묻힌 비율 20% 달해… 지금의 현충원 군인묘역에 해당 신라-가야-일본계 토기도 출토, 문화교류 흔적 오롯이 남아있어
1990년대 충북 청주시 신봉동 유적 발굴 당시 각종 토기가 출토된 토광묘들. 이곳에서는 재갈(작은 사진), 발걸이 등 백제 마구가 당시로선 최초로 발견됐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지난달 31일 차용걸 충북대 명예교수가 청주백제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손잡이잔(파수배)’ 출토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학계는 이 잔이 곡식 양을 측정하는데 쓰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청주=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 삼국시대 격전지 전사들의 무덤
20∼30cm를 파들어 갔을까. 길쭉한 모양의 금속 물체가 윤곽을 드러냈다. 당시 박물관 학예부장이던 차용걸이 손잡이 부분의 까만 녹을 긁어내자 순간 하얀 빛이 번쩍했다. 고대 지배층이 애용한 둥근고리칼(환두대도)의 ‘은장식’이 분명했다. 붉은색 점토층에 칼이 단단히 박혀 있는 바람에 발굴팀은 대도를 흙과 함께 통째로 파냈다.
흥미로운 것은 칼의 끝이 ㄱ자로 휘어 있었다는 점이다. 차용걸의 회고. “이런 형태의 칼은 처음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 끝이 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부장 당시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있어요. 청동기시대에도 주술적 의미에서 동기를 일부러 부러뜨려 묻은 게 많은데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신봉동 유적이 독특한 건 조사된 300여 기의 무덤 가운데 무기나 마구(馬具)가 묻힌 비율이 거의 20%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쇠 갑옷과 투구, 둥근고리큰칼, 손칼, 화살촉, 창, 발걸이, 재갈 등 총 1300여 점의 철기 유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곳을 “백제 전사들의 공동묘지”라고 부른다. 요즘으로 치면 현충원 군인묘역과 비슷할까. 학계는 전사들이 4, 5세기 한반도 중부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치열한 전투에서 희생된 걸로 추정한다. 이곳은 한강 유역에 왕성을 둔 백제가 남쪽의 신라를 공략하기 위한 길목이자 중요한 군사거점이었다.
○ 마한과 백제가 빚은 문화
하지만 신봉동 고분에서는 여러 개가 발견돼 백제에 복속되기 전 마한 토착 지배층의 문화로 해석된다. 반면 다리가 세 개 달린 그릇인 삼족기(三足器)나 돌방무덤(석실분) 등은 한성백제의 영향이다. 차용걸은 “3, 4세기 조성된 인근 청주 송절동이나 봉명동 고분은 백제의 지배를 받기 전 마한 토착세력의 문화를 반영하는 반면에 신봉동 고분은 백제화가 진척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일본계 토기인 스에키와 가야, 신라 토기들이 신봉동에서 발견된 것도 의미가 작지 않다. “백제가 가야를 거쳐 일본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청주지역이 가교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전사들의 무덤에도 국제 문화교류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거지요.”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37>경기 하남시 ‘이성산성’
<35>경주 나정 발굴
청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