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정치부 기자
아직 뒤숭숭한 때였지만 김정은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공동경비구역(JSA) 북측 구역에 있는 판문각 전망대에 올라 쌍안경을 들고 남측 구역을 직접 살폈다. 한 정부 관계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남측에서 총 쏘면 닿을 거리까지 얼굴을 내비친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초 나온 김정은 화보집 ‘인민의 위대한 하늘’에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자 김정은이 소리쳤다. “최고사령관이 나왔는데 어느 놈이 감히 덤벼들겠는가. 최고사령관이 지켜주겠으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다 데려오라.”
이에 초병 전부가 초소를 텅텅 비운 채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동행한 지휘관은 “초소가 빈 적은 처음”이라며 김정은의 담력을 칭송했다.
물론 우상화의 일환인 화보집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김정은이 만만치 않은 배포를 가진 것은 추정할 수 있다. 김정은의 판문점 시찰은 그 후론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김정은은 종종 최전방을 찾는다. 북-미 간 긴장감이 한껏 고조된 8월에도 중부전선 최전방 부대를 찾았다고 정부 관계자는 말했다.
김정은 얘기를 꺼낸 것은 사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회 연설이나 캠프 험프리스 방문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강력한 대북 압박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발언 내용 못지않게 장소 또한 중요하다. 최전선과 후방이 주는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다. 미 폭격기의 암살 공포에 시달리는 김정은이 위험을 감수하며 전방을 찾아 군인들을 격려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헬기로 DMZ를 찾아 서울과 DMZ가 지척인 것을 피부로 확인했으면 했다. 발아래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을 보며, 혹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을지 모를 대북 공격 카드를 접기를 희망했다.
문재인 정부가 일부 외신 보도처럼 실제 트럼프의 DMZ 방문을 만류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청와대는 부인했지만 캠프 험프리스 방문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DMZ행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앞서 방한한 미국 대통령들이 위험을 감수하며 찾았던 DMZ 방문은 문재인-트럼프 대통령 때 와서 ‘상투적’인 것이 돼 버렸다. 한미 지도자가 강력한 대북 압박을 펼친다고 입을 모으면서 ‘DMZ 패싱’을 결정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황인찬 정치부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