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찍는 사진사/박완서 지음/330쪽·1만4000원·문학판
고 박완서 소설가는 ‘작가의 말’에서 “허명의 함정속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함정을 함정으로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만이 그곳에 매몰됨이 없이 성장의 한 과정을 삼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동아일보DB
‘창밖은 봄’에서는 식모살이를 하다 억울하게 쫓겨나지만 욕심 없이 사는 길례의 웃지 못할 인생 역정을, ‘꼭두각시의 꿈’에서는 부모의 높은 기대에 반항심을 품은 채 재수하는 청년 혁의 성장을 그렸다.
1978년 초판이 나온 후 절판됐던 이 소설집은 39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왔다. 저자도 이 책을 갖고 있지 않아 재출간을 원했지만 갑작스레 타계하면서 끝내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저자가 등단한 지 10년이 되지 않았을 무렵, 50세를 바라보며 글쓰기에 대한 간절함을 봇물처럼 쏟아낸 자취를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모순되고 허위의식에 가득 찬 인간의 속성을 예리하게 꿰뚫은 저자의 통찰은 섬세한 문장에 담겨 읽는 이의 머리와 가슴을 향해 직진한다. 고상한 척하지만 식모의 험담을 하며 쾌감을 느끼는 교수 부인, 촌지를 모아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몰래 내주지만 별 반응이 없자 괘씸해하는 교사 김영길의 심리를 적나라하고도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하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온기가 스며 있다. 오숙경이 오갈 데 없어진 고교 동창을 보며 집의 빈방을 떠올리고, 김영길의 동료 체육 교사가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학생을 업고 산동네를 아무렇지 않게 오르는 모습이 그렇다. 인간에 대한 희망의 싹 하나를 살짝 틔워놓은 것 같다고 할까.
세밀화처럼 정교하게 그린 1970년대 풍경은 아스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흑백 사진 속으로 들어가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이던 당시의 저자를 만난 기분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