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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권세가 집사, 관청 서리로 ‘낙하산 취업’

입력 | 2017-11-06 03:00:00

주인 집안일 도맡은 ‘겸인’




단원 김홍도가 그린 신임 관리의 행차(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 모습. 말에 탄 이들 중 오른쪽 두 명이 ‘중방(中房)’인데 이는 겸인의 다른 명칭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노비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면서 집안일을 맡아보는 자를 겸인(겸人)이라 한다.”(최신·崔愼, ‘화양문견록·華陽聞見錄’에서)

조선시대에는 집사를 ‘겸인’이라고 했다. 청지기(廳直), 소사(小史), 통인(通引)이라고도 불렀다. 그들은 주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집안일을 도맡았다. 중인 신분이었으므로 노비가 하는 허드렛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겸인은 사무 보조 및 문서 작성에 능숙해 주인의 업무를 대신했다. 집안 사정을 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부 정보 입수도 빨랐기에 역모가 발각되면 관련자들의 겸인부터 잡아들였다.

주인의 병간호도 겸인의 일이었다. 채제공(蔡濟恭) 집안의 겸인 장덕량은 병으로 앓아누운 채제공의 부친을 위해 낮에는 음식을 떠먹이고 밤이면 발을 1000번씩 주물렀다. 긴 병에 효자 없다지만 장덕량은 여러 해 변함없이 주인의 병 수발을 들었다. 채제공은 아들인 자기보다 낫다고 했다.

겸인에게 월급을 주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겸인이 충성을 다한 건 취직을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중앙관청의 서리는 대부분 권세가에서 낙하산으로 내려보낸 겸인이었다. 중앙관청 서리의 권력은 웬만한 양반보다 나았다. 관청 실무는 거의 서리가 맡았기 때문에 사대부 관원도 이들의 눈치를 봤다.

호남 선비 황윤석(黃胤錫·1729∼1791)이 사복시 관원으로 임명되자 하숙집 주인이 그에게 귀띔해 주었다. “사복시의 서리와 하인은 모두 대갓집 청지기입니다. 관원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점검하는데, 나리의 경우는 더욱 자세히 살필 것입니다. 그들에게 원망을 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설마 했던 황윤석은 서리들의 농간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겸인은 주인에게 관청에서 입수한 정보를 귀띔해 주거나 이익을 상납했다. 수입도 쏠쏠했다. 홍봉한의 겸인 노동지는 서리 노릇 3년 만에 평생 놀고먹을 재산을 마련했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겸인은 관청의 거대한 좀벌레”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겸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보다 ‘의리’였다. 홍동석(洪東錫)은 노론 사대신의 한 사람인 조태채의 겸인 노릇을 하다가 관청의 서리가 됐다. 소론 측 관원들이 그를 불러 조태채를 탄핵하는 상소의 글씨를 쓰라고 했다. 홍동석은 거부했다. “주인과 겸인은 아버지와 아들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매질해도 굴하지 않아 결국 다른 사람이 글씨를 썼다.

탄핵을 당한 조태채는 제주로 유배 가서 사약을 받게 됐다. 홍동석은 조태채의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형 집행을 늦춰달라며 금부도사에게 사정했다. 금부도사가 거절하자 홍동석은 사약 그릇을 엎어버렸다. 지켜보던 이들은 경악했다. 결국 한양에서 다시 사약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조태채는 아들을 만나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물론 사사로운 의리를 위해 국가의 행정을 농락한 행위는 잘못이겠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