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트럼프 아시아 순방, 韓中日 의전 비교해보니
우리나라는 동서양의 조화를 꾀하는 절제된 의전과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진심 의전’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멜라니아 여사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다. 특히 멜라니아 여사는 백악관 관계자들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처음 본다”고 했을 정도로 3국 중 한국에서 가장 많이 말하고 웃었다는 평이 뒤따랐다.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가장 먼저 맞이한 일본은 특유의 ‘오모테나시(극진한 대접)’ 외교를 선보이며 정상 간 친밀감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다. 특히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5일 골프광인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세계적 골퍼 마쓰야마 히데키를 섭외해 황제 골프 접대를 펼쳤다. 중국은 8일 오후 미국 대통령 부부만을 위해 자금성을 통째로 휴관하는 ‘황제급 의전’과 284조 원짜리 돈 보따리를 내밀어 껄끄러웠던 미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전환하는 성과를 거뒀다. ‘총성 없는 전쟁’이 펼쳐졌던 한중일 의전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 품격과 절제
취타대-사물놀이 가락에 트럼프 어깨 들썩… 청와대 만찬땐 술 대신 다이어트 콜라 준비
이날 멜라니아 여사(앞쪽)가 아키에 여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도쿄 초등학교에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도쿄=AP 뉴시스
짧은 탄식이 흘렀지만 취타대는 긴장하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 내외가 도착하자 힘차게 연주를 시작했다. 캐딜락원은 조선시대 어가행렬처럼 호위를 받으며 청와대 본관으로 들어서 ‘국빈방문’의 서막을 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 기간 내내 이 장면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특히 국빈만찬은 동서양의 조화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었다. 메인 메뉴인 가자미구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생선요리인데, 문재인 대통령의 고향인 거제도 가자미로 만들었다. 미국은 6월 백악관 만찬에서 문 대통령을 위해 가자미구이를 내놓았다.
만찬 공연에서 연주자 정재일 씨와 유태평양 씨는 ‘축원과 행복’을 기원하는 비나리를 사물놀이 가락 위에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연주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리듬을 타면서 어깨를 들썩거렸고, 공연 후 손을 높게 들어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은 술을 마시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다이어트 콜라’를 내놓는 세심한 의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참가자들이 서로 술을 따라주다 보면 트럼프 대통령도 잔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의전팀이 직접 만찬 초반 트럼프에게 콜라를 담은 잔을 서빙했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화려함보다는 정성스럽게 우리 색채를 충실히 전함으로써 한미동맹을 강조할 수 있는 의전을 고려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녹지원에서 김정숙 여사가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그림책을 보고 있다. 이 책은 한미 어린이 환영단의 한 어린이가 선물한 것으로, 트럼프 대통령 부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뉴시스
문 대통령은 중국 베이징으로 향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출국이 다소 지연되자 인도네시아로 가는 자신의 출국 시간을 15분가량 늦출 만큼 트럼프 대통령 예우를 끝까지 챙겼다.
미국 언론의 방한 취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부 차질이 생겼지만 양측의 협조로 잘 마무리된 일도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 방한할 때 백악관은 청와대에 풀기자단(전체 기자단 중 대표로 행사에 들어가 취재하는 기자) 명단을 방한 일주일 전에는 보내는 게 관행이다. 하지만 이번에 백악관은 명단을 방한 당일인 7일 제출했다. 미국 측의 실례였지만 청와대는 빠른 행정처리로 업무 공백을 메웠고, 차후 백악관 측으로부터 “미안했다. 진심으로 감사했다”는 인사를 들었다.
● 위엄과 과시
황제 건륭제 걸었던 동선따라 자금성 안내… 베이징 동물원 문닫고 멜라니아에만 개방
이날 멜라니아 여사(앞쪽)가 아키에 여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도쿄 초등학교에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도쿄=AP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 부부만을 위해 8일 베이징(北京) 자금성을 휴관해 통째로 비우는 ‘황제급 의전’을 베푼 것도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다. 시 주석은 청나라 최전성기 황제 건륭제의 전용 동선을 그대로 따라 걸으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금성 구석구석을 안내했다. 그러고는 문물보존센터에 들러 화려하고 정교한 도자기와 서화 등을 보여줬다. 시 주석은 대뜸 트럼프 대통령에게 황금색 종을 가리키며 “들어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게 때문에 들지 못하자 시 주석은 그제야 “(실은 들지 못할 정도로) 정말 무겁다”며 웃었다.
멜라니아 여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펑리위안 여사와 베이징의 한 초등학교에서 서예 수업 도중 붓으로 판다의 눈을 그리는 모습. 베이징=신화·AP 뉴시스
AFP통신에 따르면 8일 자금성에선 미중 정상 사이에 흥미로운 대화가 오갔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역사가 5000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고 하자 시 주석이 “기록된 역사는 3000년”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러면 8000년의 이집트가 더 오래된 것이군요”라고 하자 시 주석은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단일 문명이다. 우리는 스스로 ‘용의 자손’이라 부른다”고 받아쳤다.
중국의 ‘역사 우월감’ 의전 코드를 극대화하는 장치는 비밀주의다. 중국 정부는 외신들이 시 주석과 트럼프 대통령이 방중 첫날(8일) 만찬을 자금성에서 함께한다고 잇따라 보도해도 트럼프 대통령의 자금성 방문 때까지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7일 테리 브랜스태드 주중 미국대사가 관영 중국중앙(CC)TV 인터뷰에서 “Forbidden City(자금성)”라고 말한 대목을 ‘명승고적’이라고 번역해 자막에 넣었을 정도였다.
CCTV는 10일 멜라니아 여사의 만리장성과 베이징 동물원 방문 계획 역시 애써 감췄다. 8일 저녁 보도에서 두 곳이 10일 하루 개방하지 않는다고 공고했다는 사실만 전하는 방법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분위기만 풍겼을 뿐이다.
중국은 자국에 비판적인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자 트럼프에게 영향력이 큰 것으로 알려진 장녀 이방카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였다. 중국은 이방카만을 위해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와의 행사까지 준비했지만 이방카의 중국 방문은 이번엔 성사되지 못했다.
● 배려와 감성
골프-햄버거로 ‘정상 대 정상’ 친밀함 강조… 트럼프 딸 이방카의 지난 생일까지 챙겨줘
이날 멜라니아 여사(앞쪽)가 아키에 여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도쿄 초등학교에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도쿄=AP 뉴시스
한중일 순방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 방문 첫날인 5일 아베 총리와 느긋하게 골프를 즐기며 장시간 환담을 나눈 것이 대표적이다. 2월 미국 마러라고에서 첫 골프를 친 뒤 두 번째 라운드였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일본 측은 트럼프 대통령의 첫 방문국을 일본으로 할 것과 주말을 낀 일정을 잡아 달라고 미국에 거듭 요청했다고 한다.
아베 총리는 6일 만찬에선 자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와 골프를 쳤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남긴 “골프는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칠 수 있다”는 발언을 소개하며 “두 번이나 함께 골프를 치는 건 굉장히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고는 어렵다”고 특별한 관계를 강조했다.
이날 멜라니아 여사(앞쪽)가 아키에 여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도쿄 초등학교에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도쿄=AP 뉴시스
사실 트럼프에 대한 접대는 아버지에 앞서 2일 ‘국제여성회의 2017’ 참석차 일본을 찾은 장녀 이방카에서부터 시작됐다. 트럼프에 대한 영향력이 큰 이방카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아베 총리가 직접 만찬을 대접했고 나흘 전에 지나간 생일까지 챙겨주기도 했다. 아베 총리가 ‘이방카 기금’에 5000만 달러 출연을 약속하자 이방카는 연설에서 “아베노믹스는 우머노믹스(여성이 주도하는 경제)”라고 화답했다.
아베 정부의 외교력이 제대로 발휘된 예는 2016년 11월 미 대선 직후 뉴욕 트럼프 타워를 방문했을 때였다. 주미 일본대사관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당선을 예상하면서도 공화당 후보로 나선 트럼프 쪽에도 네트워크 만들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郞) 주미 대사는 개표 당일 트럼프 당선이 확실해지자 즉각 ‘막후 실세’로 불리던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 인맥을 동원해 트럼프와 아베 총리의 면담 일정을 잡았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돌발 상황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5일 골프 중에 아베 총리가 벙커에서 나오다 구르는 장면, 6일 두 정상이 잉어에게 먹이를 주다 트럼프 대통령이 먹이를 한꺼번에 쏟아붓는 장면 등이 취재 카메라에 포착됐다. 일본 정부는 행사의 홍보를 생각하고 방송 취재를 허가했겠지만 예기치 않은 망신살이 뻗친 꼴이 됐다.
극진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의 불공정 무역을 비판하고 방위장비 구매를 종용한 것에 대해 비판론도 적지 않다. 9일 발간된 한 주간지 제목은 ‘아베 총리, 트럼프 부녀의 발을 핥았다’였다. 또한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다걸기(올인)’하는 것에 대해서도 일본 내에서 “위험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 베이징=윤완준 / 도쿄=서영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