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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고미석]아찔한 치파오

입력 | 2017-11-11 03:00:00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화양연화’의 한 대목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아련하게 채색한 영화에서 배우 장만위(張曼玉)는 중국 전통의상 치파오(旗袍)를 수십 번 갈아입고 등장해 치명적 매력을 발산한다.

▷치파오는 높은 옷깃, 치마 옆트임(slit)과 함께 몸에 착 달라붙는 것이 특징. 청나라를 지배한 만주족의 팔기군 복장에서 유래한 옷인데 남녀 공용에서 여성 의상으로 발전했다. 1920년대 상하이를 중심으로 고혹적 분위기를 강조한 개량형 치파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972년 미중 정상회담 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부인 팻 여사가 “중국에 왜 인구가 많은지 알겠다”고 했다는 말이 있을 만큼 관능적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에선 시상식 도우미 차림으로 속옷 라인까지 도드라지는 치파오를 선보여 논란을 빚었다.

▷장만위의 뒤를 이을 치파오의 새 강자가 나타났다. 9일 중국 국빈만찬에 미중 퍼스트레이디가 나란히 치파오 블랙드레스 차림으로 등장한 것이다. 멜라니아는 소매에 모피가 달린 화려한 자수 드레스로, 펑리위안은 소매의 맨살이 비치는 시스루 드레스로 양보할 수 없는 패션 대결을 펼쳤다. 모델 출신의 멜라니아는 허벅지 중간까지 쭉 트인 현대적 치파오를 마놀로 블라닉의 킬힐과 매치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돋보이는 각선미를 과시했다. 이 옷은 이탈리아 브랜드 구치가 2016년 FW시즌 치파오를 기반으로 내놓은 기성복이다. 펑리위안은 무릎까지 트인, 상대적으로 정숙한 치파오를 택했다.

▷이들의 패션 대결과 상관없이 이날의 최종 승자는 단연 치파오. 중국은 치파오를 단정, 우아, 지성미를 갖춘 여성 외교의 복장이라고 선전한다. 미국 퍼스트레이디 덕분에 돈 한 푼 안 들이고 중국 전통의상의 맵시를 세계에 홍보한 셈이다. 패션은 문화를 넘어 산업적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세계적 디자이너들이 한복과 사랑에 빠져 우리 고유의 미학이 녹아든 옷을 내놓는 날은 언제일까. 치파오의 약진에 비하면 우리 옷의 세계화는 갈 길이 멀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