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화 前 국회의장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회고록 제목을 ‘아름다운 복수’로 한 이유에 대해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했을 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일본에 아름다운 복수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며 “더 훌륭한 나라를 만들어 일본이 고개를 숙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이진구 기자
―박 전 대통령과의 핫라인을 받았는데 연결이 안 됐다던데….
“국회의장 되고 청와대에 처음 인사차 갔을 때 박 대통령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할 수 있는 핫라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대통령이 ‘좋다’고 했다. 얼마 후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이 연락해 번호를 알려줬다. 박 대통령이 직접 받는 전화라고…. 그래서 했는데 안 되더라고.”
―신호는 가는데 안 받은 건가.
“신호는 가는데 아무도 안 받았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두 번 했는데…, 그래서 좀 의아스러웠다. (추후에라도 전화가 안 오던가?) 그 부분도 의아스러운데, 보통 수행비서가 그 전화기를 갖고 있을 것 아닌가. 명색이 국회의장이 전화했는데 대통령에게 왔다고 말을 했을 테고…. 수행비서가 자기 마음대로 자를 수는 없을 테니까. 김기춘 비서실장이 나한테 분명히 ‘대통령이 쓰는 직통전화’라고 했거든. 오죽하면 내가 잘못 적었나 싶어 당시 조윤선 정무수석에게 이 번호 맞느냐고까지 물었다. 그랬더니 ‘맞습니다. 저도 그 번호 써요’라고 하더라. (잉? 속된 말로 그냥 씹은 건가?) 몰라. I don‘t know. 나중에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그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는 ‘핸드백 속에 있어서 못 받았겠죠’ 하며 넘어갔다. 미주알고주알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2015년 12월 직권상정 요청을 위해 국회의장실로 향하는 새누리당 의원들.
―이후 박 전 대통령과 직접 소통은 어떻게 했나.
“2015년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이던 유승민 의원 문제와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를 야기한 국가보훈처장 해임 요구, 남북 국회의장 회담 등을 건의하기 위해 당시 이병기 비서실장에게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 뒤에 이 실장을 만났는데 ‘대통령이 왜 (정 의장의 전화를)받았느냐고 역정을 냈다’고 하더라. (무슨 말인가?) 왜 전화를 받아서 그런 얘기를 하느냐는 뜻이겠지. 이 실장이 되레 대통령에게 ‘아니 내가 비서실장인데 국회의장 전화를 어떻게 안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를 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박 대통령을 만났나.
“날짜를 달라고 했는데 안 줬다. 앞서 말한 세 가지를 얘기하려고 했는데…. 한 2주 정도 지나 공항 귀빈실에 앉아 있는데 전화가 하나 와서 받았더니 ‘정호성입니다(정호성 비서관)’라고 하더라. 대통령 전화라면서…. 오후 4시 15분경이었다. 10분 후에 비행기 타야 하는데. 전화로 다 얘기를 하기는 어렵고 해서 유승민 의원 얘기는 빼고, 보훈처 이야기만 했다. 남북 국회의장 회담 얘기도 했더니 ‘북이 악용할까 봐 걱정된다’고만 하더라. 그건 국정원이 늘 하는 소리지. (핫라인으로 받은 번호였나?) 그건 잘 기억이 안 난다. 지금은 번호를 다 지워서….”
※현재 그의 휴대전화에서 박 전 대통령과의 핫라인이라고 했던 번호는 지워진 상태다. 그는 “‘박 대통령 직통’이라고 저장한 것 같은데 왜 없어졌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상대가 대통령이고 여성인데, 국회의장이라는 사람이 왜 안 만나주느냐고 하기는 어렵다. 상식적으로 국회의장이 독대신청을 했으면 당연히 날짜를 잡아주는 거지. 그러면 차분하게 이런저런 얘기도 할 수 있는 거고. 이병기 실장 말을 들으면 그게 싫다는 걸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내 동선을 다 알 테니 거기에 맞춰 딱 10분 정도 얘기하려고 전화를 한 거지. 만나자고 한 데 대한 답이 그것이었던 것 같다.”
지난 2, 3년간 정치는 말 그대로 ‘○판’을 방불케 했다. 특히 청와대와 새누리당 안에서 벌어진 일련의 비상식적인 일들은 자신들의 몰락은 물론이고 국격의 추락까지 불렀다. 그 무리수의 시작점이 국회의장에 대한 직권상정 압박이었다.
―직권상정 때문에 청와대와 참 많은 갈등을 빚었다.
“2015년 12월 15일, 당시 현기환 대통령정무수석이 나를 찾아왔다. 대통령이 보냈다면서…. 경제활성화법, 노동법 등을 직권상정해 주지 않으면 선거법도 안 된다는 것이다. 선거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시간상 총선을 늦추거나 입법 공백 사태가 벌어질 상황이었다. 그대로 2016년 1월 1일이 되면 헌법재판소의 헌법불일치 결정에 따라 선거구가 사라지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선거법이 통과돼야 구획정리도 하고 선거준비를 하는데…. 총선을 못 하는 한이 있어도 이건 통과시켜야 한다고 거의 협박성 발언을 했다. 태도까지… 내가 대선배인데도 강압적인 태도로…. 몸도 삐딱하게 틀면서…. 내가 기가 차서 ‘권력이 며칠 간다고…’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걸로 끝나던가.
“직권상정 요건은 천재지변, 국가 비상상황, 여야 합의된 것 등 셋밖에는 없다. 그랬더니 직권상정 요건에 ‘재적의원 과반수 이상 요청’을 추가한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한 친박 좌장 의원은 전화를 걸어 ‘직권상정 요건이 없어서 안 된다길래 요건을 만들어줬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하니 우리가 의장을 잘못 뽑았구먼’ 하며 전화를 탕하고 끊기도 했다. 소리를 들어보면 집어 던진 것 같았다. 기절초풍할 일이지….”
“정 때문이라기보다는…, 나도 내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비전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새누리당이 그래서는 안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된 후 새누리당 안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이것은 그동안 내가 사랑했던 신한국당, 한나라당이 아니라 개인 박근혜 사당이었다. 박근혜 개인 정당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정치를 계속할 생각이었지만, 특정인의 사당에서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복당을 안 했다.”
―임기 말 ‘제3지대’를 만들어 정치를 바꿔보려는 노력을 했는데….
“대한민국이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개헌이나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 등 중차대한 일들이 이뤄져야 한다.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이런 일들을 해보자는 취지였는데 잘 안 됐다.”
―잘 안 된 이유가 무엇인가.
“추진할 때는 정상적으로 2017년 12월에 대선이 치러진다는 계산으로 했다. 당시 김종인 의원, 정운찬 전 국무총리, 손학규 전 대표 등과 함께 추진했는데 중간에 대통령 탄핵이 벌어지고, 바른정당이 창당되고, 대선이 벌어지면서 정치판이 요동을 쳤다. 그러다 보니 자연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동력도 잃었다. 그래서 올해 대선을 한 달 정도 남기고 미국으로 갔다. 뭐,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정계를 은퇴한 셈이다.”
―5선 의원, 20년 동안 정치하면서 겪은 가장 큰 위기가 무엇이었나.
“공천 탈락이지. 하하하. 2012년 19대 총선에서 공천권을 쥔 친박들이 부산의 3선 이상 중진의원을 공천에서 배제시킬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한창 공천심사 기간인데, 공천위원 중 한 분이 내 지역구가 전략지역으로 결정됐다고 알려줬다. 공천에서 탈락됐다는 뜻이다. 무소속이라도 출마를 해야 하는지 고민했는데 어머니가 ‘야야, 고만하면 됐다’고 하시더라. 4선에, 국회의장 직무대행까지 했으니 더 욕심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일이 풀렸다.”
―엉뚱한 데서 풀렸다니….
“그때 내가 국회부의장이었는데, 당시 박희태 국회의장은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으로 사직 상태였다. 내가 만약 공천에 탈락해 무소속으로 나오면 당시 야당 부의장인 홍재형 의원에게 국회 의사봉이 넘어가게 된다. 이걸 국회사무처가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회에 알려줬더니 4일 만에 번복돼 공천을 받았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보나.
“나는 적폐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못된 시스템, 규제, 관습 등이 문제지. 적폐청산은 좋은데 그로 인해 또 다른 적폐가 생기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예를 들어 민주당은 새누리당이 여당일 때 대통령민정수석의 국회 출석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집권했을 때 스스로 민정수석이 국회에 출석하면 한 가지 적폐가 청산되는 것 아니겠나. 지금 와서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도 안 나왔다고 하면서 안 나오면 되레 적폐를 만드는 것 아닌가.”
―JP(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정치는 ‘허업(虛業·실속 없는 일)’이라고 했는데 끝내고 난 지금 소회가 어떤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국회가 청와대의 거수기, 통법부 노릇을 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후반기에 각종 법안들을 직권상정하라고 압박이 오는데 만약 못 버텨서 통과시켰다면 지금 나라가 어찌 됐을까. 대의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청와대 압력을 막으라고 정치인이 되고 국회의장까지 된 것 아닌가 하는 확신까지 들 정도였다. 새누리당에서 ‘국회의장 탄핵하자’는 말까지 나왔으니까…. 그 소명을 다했으니 퇴장하는 거지…. 허업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