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화면 캡처
“나는 금년 6살 난 처녀애입니다. 내 이름은 박옥희이구요. 우리 집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났군, 외삼촌을 빼놓을 뻔했으니…”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예로 드는 작품이 바로 ‘사랑 손님과 어머니’다. (나중에 이를 영화로 만든 작품 제목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다.) 이 작품은 서울 사투리를 가장 잘 묘사한 작품으로도 손꼽히지만 정작 이 작품을 쓴 주요섭 선생은 평양에서 자랐다.
주 선생은 평양에서 숭실중학을 다니다 일본 도쿄(東京) 야오야마학원(靑山學院)에 편입한다. 3·1 운동 이후 귀국한 주 선생은 동아일보 평양 지국 기자로 잠시 일하다 중국 상하이(上海) 후장대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했다.
평양지국에서 숙천(肅川)분국 문을 열면서 주요섭 기자(색칠한 부분)를 채용했다는 사실을 알린 1922년 7월 21일자 동아일보 사고(社告).
후장대 생활을 마치고 미국 스탠퍼드대로 건너 간 주 선생은 1930년 2월 6일부터 동아일보에 ‘미국 문명의 측면관(側面觀)’이라는 글을 8회에 걸쳐 실었다.
미국 스탠퍼드대 유학 시절 주요섭 선생이 동아일보에 연재한 시리즈 ‘미국문명의 측면관’ 제1회.
스탠퍼드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는 이후에도 ‘시험 철폐와 그 대책’ 시리즈를 20회, ‘의무교육을 목표’라는 시리즈를 12회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석사 학위를 따고 1931년 10월 귀국한 그는 아예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 편집 책임자가 된다.
주 선생이 동아일보에 입사하고 나서 6개월 뒤에는 김자혜 기자가 신동아에서 일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나중에 부부가 된다. 당시 주 선생은 이혼을 한번 경험한 뒤였다.
당시 신동아 기자였던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은 1991년 신동아에 “송진우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 사내에서의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엄격했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은 두 사람 모두가 퇴사를 한 후에야 이루어졌다”고 회상했다. 주 선생은 1934년 8월 회사를 떠나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던 푸런(輔仁)대 교수가 된다.
1995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자혜 여사 인터뷰
동아일보는 1934년 9월 28일자 석간 2면에 주 선생의 푸런대 부임 소식을 전했고, 주 선생도 1935년 2월 17일부터 156회에 걸쳐 장편 소설 ‘구름을 잡으려고’를 연재하는 등 이후에도 계속 동아일보에 글을 썼다. 동아일보와 주 선생의 인연이 끝난 건 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1972년 오늘(11월 14일)이었다.
1972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에 나간 주요섭 선생 부고 기사
이 신안 주씨 가문에서 주 선생만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건 아니다. 그의 친형인 주요한 선생도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다. 1913년 노벨 문학상은 탄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타느 타고르가 1929년 동아일보를 통해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보낸 시 ‘동방의 등불’을 번역한 이가 바로 주요한 선생이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