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하는 손기정 선수의 모습. 동아일보DB
마라톤 영웅 손기정 옹의 별세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2002년 11월 15일자 1면.
81년 전으로 돌아가 본다.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였다. 전국이 얼마나 큰 흥분에 휩싸였는지를 동아일보 지면이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광화문통 본사 앞 광장을 꽉 에워싼 수백 명의 우산 쓴 관중은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목을 길게 빼어 기다리다가” 결과가 알려지자 만세를 부른다. “광화문통 네거리의 적막을 깨트리고(…) 손기정 군 만세, 조선 만세를 쉴 새 없이 부르더니 또다시 동아일보 만세를 부르고…”(동아일보 1936년 8월 10일자 1면)
고국에서 만세 연창이 이어졌을 때 올림픽 스타디움의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는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국가가 울려 퍼졌다. 식민지 청년이 느꼈을 울분은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잘 알려진,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거였다.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자에 실린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장면. 가슴 부분의 일장기가 지워져 있다. 동아일보DB
손기정은 집안이 가난해 16세에 돈을 벌기 위해 중국 단둥의 회사에 취직했다. 차비가 없어 신의주 집에서 압록강 철교를 지나 단둥까지 이르는 20여 리 길을 매일 달려 출퇴근한 일화는 유명하다. ‘가난해 차를 못 타고 달려야 했던’ 일상이 마라토너로서의 기초 훈련이 됐다. 그는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수차례 우승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와 동아마라톤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1932년 제2회 동아마라톤에서 2위를 차지한 인연으로 양정고보에 입학했다. 이듬해 같은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조선 최고의 마라토너로 자리매김했다. 광복 후 감독으로 참가한 1947년 보스턴마라톤을 앞두고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선수들을 합숙 훈련시킨 일화도 유명하다. 장독대 옆에 국기게양대를 세워놓고 이른 새벽에 선수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른 뒤 연습을 시작할 만큼 조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때 그가 훈련시켰던 서윤복 선수는 우승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 선수가 손기정 옹과 기쁨을 나누는 모습. 동아일보DB
1990년대에 황영조 이봉주라는 걸출한 마라토너들이 배출됐지만 현재의 한국 마라톤은 침체기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의 마라톤팀 감독을 맡고 있는 황영조는 최근 “마라톤은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종목인데 지금 우리나라 선수들은 ‘혼’이 빠져 있다”고 말했다. 생전의 손기정 옹의 질책과 닮아있다. 한국 마라톤의 부활을 위해선 손기정 황영조의 헝그리 정신이 필요해 보인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