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주재원 생활을 오래 한 A 선배는 집에 기도실까지 만들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 신자다. 주일학교 교사, 신도회장 등 각종 교회 활동도 열심이었다.
그의 골프 사랑도 깊었다. 다른 날은 상관없지만 일요일이 문제였다. 예약이 어려운 골프장에서 골프를 칠 기회, 실력이 엇비슷해 제대로 일합을 겨뤄야 하는 이들과의 회동이 유독 일요일에만 몰리자 그의 고민이 깊어졌다.
어느 날 A 선배는 미 PGA 대회가 열리는 유서 깊은 명문 골프장에 갈 기회를 잡았다. 게다가 3명의 동반자도 다 친한 사람들이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소망이 성사됐기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요일 예배를 포기했다. “하나님도 이 골프장에 간다면 봐 주실 거야”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전반이 끝날 무렵 일이 터졌다. 소위 ‘O.K.’라 불리는 ‘컨시드(concede·그린 위의 볼을 1퍼트 만에 홀에 넣을 수 있다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상황에서 동반자들이 이후 퍼트를 면제해 줌)’를 받을 수 있는 짧은 퍼팅만을 남겨둔 A 선배. 동반자들은 이미 컨시드를 선언했다. 그런데도 굳이 퍼팅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화를 당했다.
이 쉬운 퍼팅이 홀 컵을 스치자 그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후 드라이버, 우드, 아이언, 퍼팅 모두 난조를 보였다. 결국 최종 스코어에서 골프 인생 최고 타수를 기록하는 참사(?)까지 발생했다. 골프를 치지 않는 나는 저녁 식사 때 A 선배 및 일행들과 합류했다. 그는 완전히 나라 잃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A 선배가 “앗”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을 쾅 쳤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놀라니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 “그 쉬운 퍼트 말이야. 그때가 바로 교회에서 예배를 시작하는 시간이었어.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벌주신 거라고.”
A 선배는 이후 일요 예배와 골프장을 두고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그의 ‘교회 우선’ 원칙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을 열심히 받드니 골프도 더 잘 된다”는 말도 했다. 그와 골프 실력을 겨룰 일이 없는 필자야 뭐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는 알 것 같다. 종교 유무를 떠나 내적 갈등 없이 골프장에 가야 평정심을 찾을 수 있고, 평소보다 좋은 성적을 거둘 확률도 높아진다는 의미다.
불교도 골프와 관련이 많다. ‘젠 골프(Zen Golf)’ ‘젠 테니스(Zen Tennis)’ ‘모든 퍼트를 잘 하는 법(How To Make Every Putt)’ 등 수많은 스포츠 관련 베스트셀러를 낸 미국 라이프 코치 겸 심리학자 조셉 페어런트(Joseph Parent·68) 박사. 그는 스포츠에 일본 ‘선(禪·Zen)’ 사상에 기반한 ‘멘탈 코칭’을 도입한 인물로 유명하다.
스포츠에 일본 ‘선(禪·Zen)’ 사상에 기반한 ‘멘탈 코칭’을 도입한 미국 심리학자 조셉 페어런트 박사와 그의 베스트셀러 ‘젠 골프(Zen Golf)’
2002년 뉴욕에서 열린 한 파티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필자와 친한 미국인 친구의 사촌매형이기도 했다. 페어런트 박사의 첫 마디는 “내가 만난 한국인 중 골프를 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당신이오” 였다.
필자가 대학 때 동양사를 전공했다고 말하니 “동양 철학은 운동 경기 때 어떻게 멘탈을 강화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데 유용하다. 당신이 골프를 치기만 하면 매우 잘 칠 테니 지금이라도 시작하라”고 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2002년 필자가 페어런트 박사로부터 받은 그의 친필 사인
그의 책을 내밀며 사인을 요청했더니 페어런트 박사는 “명확한 비전과 두려움을 떨쳐내는 자신감(clear vision, fearless confidence)을 갖추라”고 써줬다. 필자는 아직 그 책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의 책 ‘젠 골프’에는 전성기 타이거 우즈의 일화도 나온다. 1990년 대 후반~2000년 대 초반 우즈의 위세는 어마어마했다.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은 은퇴하고 테니스의 로저 페더러, 축구의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기량이 만개하기 전이다. 우즈는 누가 뭐래도 ‘세계 No.1 운동선수’였다.
즉 마음의 평화는 모든 운동의 시작점이다. 20세기 서구에 ‘선’ 열풍을 일으킨 스즈키 순류(鈴木俊降·1904~71)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보다 앞서 미국에 선을 전파한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1870~1966)는 모든 유혹과 미망을 떨치고 극적인 깨달음에 다다라야 한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강조했다. 반면 순류는 “일상의 모든 것이 수행이며 깨달음의 반영이어야 한다. 어떤 전제 조건도 없이 열려 있는 마음, 즉 ‘선심초심(禪心初心·beginner’s mind)‘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페어런트 박사나 스즈키 순류가 강조하는 말과 비슷한 내용이 그 유명한 노자의 ’도덕경‘ 첫 구절에도 나온다. 즉 ’도를 도라 말하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그 이름이라고 부르면 그 진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와도 결국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 뿐이다. 비단 특정 종교의 신자가 특정 운동을 할 때가 아니라 인생 전체에서 귀감으로 삼을 말 아닐까.
박재항 하바스코리아 전략부문 대표 parkjaehang@gmail.com
::필자는?::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연구소장, 이노션 마케팅본부장, 현대차그룹 글로벌경영연구소 미래연구실장, 기아차 마케팅전략실장 등을 역임한 브랜드·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현재 프랑스계 다국적 마케팅기업 하바스코리아의 전략부문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저서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 ’브랜드마인드‘, 역서 ’할리데이비슨, 브랜드 로드 킹‘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