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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동아/11월 18일]1998년 금강산 향하는 유람선 첫 출항

입력 | 2017-11-17 16:23:00

금강산 유람선의 첫 출항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98년 11월 19일자 1면.


예순네 살의 최종순 씨는 목발을 짚고 배에 올랐다. 그는 6·25 전쟁 참전 중 왼쪽 다리를 잃었다. 금강산 내금강이 보이는 양구 전투에서였다. 내금강을 다시 보는 건 40년 만이었다. 황해 해주가 고향인 그는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면서 그는 설렘을 감추지 않았다.

해주 출신 실향민은 또 있었다. 예순아홉 살 된 심정필 씨. 그는 “북한에 가게 해달라고 30여 년 동안 매일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그의 소망은 이뤄졌다. 심 씨와 최 씨 모두 1998년 11월 18일 첫 출항한 금강산 관광 유람선의 승객이었다.

“금강산 첫 관광선 ‘현대금강호’가 실향민과 관광객 승무원 등 1355명을 태우고 18일 오후 5시 반 동해항을 출항해 19일 아침 북한 장전항에 도착했다.”(동아일보 1998년 11월 19일자 1면)

‘금강산 관광’은 현대그룹이 내놓은 관광 상품이었지만 그 자체로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금강호의 이번 출항으로 남북 분단이후 남한 주민이 관광 목적으로는 반세기 만에 처음 북한을 방문하게 됐으며 이를 계기로 남북간 대규모 인적 교류의 길이 열리게 됐다.”

금강산 관광은 1989년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방북해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초석을 다졌다. 이후 후속조처를 위한 방북이 이뤄지지 않아 의정서가 사문화되는 듯했으나, 1998년 6월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으로 ‘금강산 관광’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금강산 관광은 1998년 6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소를 실은 트럭이 줄지어 북쪽을 향해 가는 모습. 동아일보DB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다는 금강산을 실제로 만났을 때의 감격은 컸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가르며 드디어 우리 앞에 자태를 드러낸 금강산은 듣던 그대로 선계(仙界)의 절경 바로 그것이었다. 기기묘묘하게 깎이고 다듬어진 봉우리와 그 자락,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은 골짜기와 연못, 장엄하고 웅대한 폭포와 바위, 그 하나하나마다 벅차오르는 감흥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동아일보 1998년 11월 23일자 6면)

현대금강호가 4박 5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21일 장전항을 떠날 때 실향민들은 “어머니”라고 목 놓아 부르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고, 주저앉아 통곡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98년 11월 22일자 14면). 분단의 냉엄한 현실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금강산 관광은 계속돼 2005년 6월 누적 관광객 수 100만 명을 돌파했다. 그러나 200만 명에 가까워져가던 2008년 7월 북한군의 피격으로 관광객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은 전면 중단됐다.

금강산 관광객은 2005년 6월 100만 명을 돌파했다. 그러나 이후 남북관계가 냉각되면서 금강산 관광은 중단된 상태다. 동아일보DB


현대경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금강산 관광 19주년의 의미와 과제’ 보고서에선 통일 외교 안보 분야의 전문가 87%가 ‘금강산 관광 재개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통일부는 “남북 당국 간 합의를 통한 우리 국민의 신변 안전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밝혔다.

현경연의 조사에 따르면 금강산 관광의 의미에 대해 61.2%가 ‘남북한 화해와 평화의 상징’, 29.6%가 ‘상호 이해의 창구’라고 답했다. ‘단순한 관광 상품에 불과하다’는 답변자는 9.2%에 그쳤다. 그만큼 금강산 관광이 상징하는 무게감이 크다는 뜻이다. 북핵 문제로 냉각된 남북관계가 단번에 풀리긴 쉽지 않겠지만 하루 빨리 금강산 유람선이 다시 출항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