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 영화평론가
― 필립 로스, ‘죽어가는 짐승’》
살아가면서 나는, 사람들의 자아가 멀리서 보면 말간 유리구슬처럼 보였다가, 다가가면 흠집이 무수히 난 수정구슬처럼 보이는 현상을 거듭 경험했다. 필립 로스의 위 문장이 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만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심 탈레브의 견해처럼, ‘깨어져도 좋다는 생각’은 ‘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어떨 때는 더 강하게 우리의 영혼을 단련시킨다.
사랑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의 화자인 데이비드 교수는 젊은 여제자 콘수엘라의 가슴에 그만 반해버리지만, 먼 훗날 그녀는 유방암에 걸려 교수 앞에 나타난다. 교수는 수많은 여자들과 연애를 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많이 생각하고 아무리 음모를 꾸미고 공모하고 계획을 세운다 해도 그게 섹스를 능가할 수 없다”고 말한 노교수에게 이 문장은 불쑥 들이닥친다.
책의 100페이지 이전이 죽음 늙음 연애 섹스였는데,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 사랑은 허무주의적이고 냉소적이고 직설적인 한 남자의 세계관을 갈가리 찢어 없앤다. 가면, 모든 좋은 것들이 끝장나는데도, 교수는 가슴을 제거한 여자의 전화 한 통에 그녀에게 달려가려 든다. 금이 가 깨져도, 세계가 균열되어 너덜거려도, 죽음 이전에 완전히 끝장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책의 제목 ‘죽어가는 짐승’은 그래서 죽어가지만 죽지 않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랑을 포기할 수 있을까. 동지섣달 긴긴 밤에 팬티 한 장 달랑 걸치고 집에서 쫓겨나더라도, 또 기꺼이 부서질 수 있을까. 이 글의 마지막은 W B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 가는 배에 올라’의 한 구절, 책 제목을 따온 시 구절로 끝을 맺고 싶다.
‘어느 벽의 황금 모자이크 속에 있는 것처럼, 오 신의 거룩한 불 속에 서 있는 현자들이여, 소용돌이치듯 맴을 돌며 거룩한 불에서 나와 내 영혼의 노래 선생이 되어 다오. 내 심장을 살라 다오. 욕망에 병들고 죽어가는 짐승에 달라붙어 있어, 이 심장은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니. 그렇게 나를 영원의 작품 속으로 거두어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