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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교성을 점령하라” 韓中日 육군-수군 장군들의 대혈투

입력 | 2017-11-18 03:00:00

[토요기획]잊혀진 전쟁 ‘정유재란’<20>
20화: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전




1994년 율촌 산업단지(노란 점선)가 조성되기 직전에 왜교성(순천왜성)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 왜교성에서 바다 쪽으로 2.5km 거리에 조명(朝明) 연합 수군의 진영인 장도가 있고,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왼쪽 아래 지점에 조명 연합 육군의 진영인 검단산성이 있다.

정유재란 발발 이듬해인 1598년 9월 하순, 16세기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륙병진(水陸竝進) 전투가 호남 남부 연안에서 시작됐다. 조명(朝明) 연합 육군과 수군이 7년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 발발 이후 최초로 육지와 바다에서 펼친 협공 작전이자, 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한 최후의 국제전이었다.

공격 대상은 전남 순천의 왜교성(순천왜성). 왜군의 호남 최대 거점지인 이 성은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조선침략 선봉을 다투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근거지였다. 고니시는 1597년 9월 순천에 도착한 이후 근 1년간 왜교성에만 머물며 호남을 사실상 통치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전라도 연해 지역의 조선인들에게 민패를 발급하고 세금을 거두는 등 전라좌도의 왕 노릇을 했다. 왜교성에는 ‘왜병이 수만 명이라고 하지만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이 반이 넘는다’(‘연려실기술’)고 할 정도로 조선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1만5000명의 왜군과 500척의 전선이 배치된 왜교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성은 산줄기가 길게 바다로 뻗어 나와 마치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듯한 지형에 세워져 있었다. 주위 3면이 바다에 접해 있고, 나머지 1면만 육지로 이어졌다. 육로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깊이 파놓은 해자에다 땅마저 질퍽질퍽해 외부에서 진입하기가 어려웠다. 돌로 된 내성(內城)의 성곽은 다섯 겹으로 쌓여 있었고, 그 바깥으로 한 겹의 외성(外城)이 호위하고 있으며, 또 외성 주변엔 목책이 이중삼중으로 설치돼 있었다.(‘선조실록’·‘예교진병일록’)

왜교성 함락을 위해 조선과 명나라의 최고 장군들이 총출동했다. 명의 서로군(西路軍) 제독 유정과 조선군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연합육군 3만6000명, 명의 수군 도독 진린과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연합수군 1만5000명이 투입됐다. 이덕형, 김수 등 조선의 대신들도 사후사(伺候使), 접반사(接伴使) 자격으로 전투를 참관했다.



明 장군의 시샘으로 독안의 쥐를 놓치다

왜교성 전투 장면을 그린 ‘정왜기공도병’ 중 왜교성을 확대한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9월 20일 먼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명 수군과 함께 일찌감치 고금도 통제영을 출발해(9월 15일) 왜교성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순신의 응징 대상인 고니시는 반간계와 역정보로 조선을 분탕질했던 장본인. 이순신의 투옥과 칠천량에서의 조선 수군 전멸이라는 치욕도 고니시의 간계에 조선 조정이 넘어간 성격이 컸다.

이순신이 재건한 조선수군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수십 척의 판옥선 함대에 배치된 현자총통과 지자총통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포탄이 왜교성의 해상 경계초소이자 병참기지인 장도(獐島)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조선수군은 장도로 상륙해 군량 300여 섬과 우마(牛馬) 등을 빼앗고, 조선인 포로 300명도 구출했다. 왜교성에서 바다로 불과 2.5km 떨어진 거리의 장도가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고니시군이 배를 이용해 바다로 탈출할 수 있는 퇴로는 끊기다시피 했다. 수군은 인근의 삼일포, 묘도 등 왜군의 소굴까지 모조리 초토화시켰다.(진경문의 ‘예교진병일록’)

육군도 성과를 다소 거뒀다. 명군 총사령관 유정은 이날 강화회담을 미끼로 고니시를 꾀어내 생포하려다가 실패했다. 하지만 달아나는 왜군을 추격해 육박전을 벌인 끝에 수급 98급을 획득하고 왜교성을 완전 포위했다.

왜군은 연합군의 기세에 놀라 성안에 웅크린 채 농성전에 들어갔다. 이순신은 일기에 “수군과 육군이 모두 협공하니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난중일기’)고 기록했다.

왜교성에서 서쪽으로 3km 떨어진 검단산성에 지휘소를 차린 유정은 운제거(雲梯車), 비루(飛樓), 포차(砲車) 등 공성(攻城) 무기를 준비했다. 그 사이 해상에서는 총포와 함성 소리가 연일 바다를 진동시켰다. 선봉에 나선 조선수군은 왜교성의 전투를 살피러온 남해왜성(고니시의 사위인 소 요시토시 주둔)의 왜군 정탐선을 추격해 달아난 배를 접수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마침내 10월 2일 조명 연합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총공격을 하기로 했다.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쌍방간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육군 총사령관인 유정은 전투를 독전하지 않고, 철수 명령도 내리지 않는 등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마치 전의를 상실한 채 상황을 방관하는 듯했다.

전투는 이튿날인 10월 3일에도 이어졌다. 연합군은 밀서를 교환해 만조기의 야밤을 이용해 바다와 육지에서 왜교성을 다시 동시 기습하기로 했다. 왜교성은 광양만 대해와 바로 접한 곳으로 만조 때는 바닷물이 성 앞으로 수심 3m까지 올라와 큰 배도 들어올 수 있고, 간조 때가 되면 성에서 100m 이상 바닷물이 빠져서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지역이었다. 밀물 때를 이용해 왜교성 앞까지 바짝 진격한 연합수군이 편전 등을 쏘면서 급습하니 놀란 왜군들은 큰 피해를 보았다.

조선수군이 대총(大銃)으로 고니시가 있는 천수각까지 맞히자 왜군들이 당황해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아났다. 이때 포로로 잡혀있던 조선인 여인이 성 위에 올라와 “지금 왜적이 모두 도망갔으니 명군은 속히 돌진해 오시오” 하고 소리쳤다. 성의 서쪽이 비었으므로 육지의 육군이 일시에 공격하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예교진병일록’)

그러나 이때도 유정은 이상한 태도를 취했다. 보다 못해 조선 호조판서 김수가 유정을 찾아가 문을 열고 싸우자고 하소연했지만, 유정은 큰 북을 치며 소리만 낼 뿐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유정은 오히려 화까지 냈다. 유정의 넋이 나간 듯한 대응으로 결국 연합수군마저 적잖은 피해를 보았다. 명의 함대인 사선(沙船) 19척과 호선(호船) 20척이 조수가 빠지는 것을 놓쳐 그만 갯벌에 얹혀버렸고, 많은 군사가 죽거나 붙잡혔다.(‘난중일기’)

이틀 연속 유정의 태도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전투를 지켜본 우의정 이덕형은 휘하 장수와 군졸로부터도 업신여김을 받은 유정의 행동을 진린에 대한 시기와 견제로 해석했다. “제독(유정)이 수군(진린)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당초부터 공(功)을 서로 다투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끝내 일처리가 잘못되고 말았으니 더욱 통곡을 금할 수 없다.”(‘선조실록’) 게다가 명군 내부의 지역감정도 작용했다. 유정의 사천성 군사들과 진린의 절강성 군사들은 반목과 질시가 심했다.

10월 3일 전투에서 수군을 잃은 진린은 분노했다. 이튿날인 4일 진린은 이순신과 함께 해상에서 왜교성을 공격했으나, 왜군도 필사적으로 대포로 응전해 할 수 없이 철수했다. 진린은 유정의 막사를 찾아가 수자기(帥字旗)를 찢으면서 전투 회피 책임을 상부에 보고하겠다고 격노했다. 얼굴이 흙빛이 된 유정은 눈물을 흘리면서 변명으로 일관할 뿐이었다.(‘연려실기술’) 5일에도 이덕형과 권율이 싸우기를 눈물로 호소했으나 유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중로군(中路軍)이 참전한 사천왜성에서마저 연합군이 패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정은 겁을 먹고 10월 7일 밤 철수해버렸다.

이순신은 “유정이 후퇴하여 달아나려고 한다”는 권율의 편지를 받고는 분노와 통탄을 금치 못했다.(‘난중일기’) 이순신과 진린은 육지의 명군이 퇴각하는 10월 7일에도, 또 그 다음 날인 8일에도 수군 단독으로 왜교성을 계속 공격했다. 그러나 육군의 공격을 더 이상 받지 않는 상태에서 고니시 군의 저항은 격렬했다. 결국 수군은 10월 9일 왜교성 앞바다에서 물러나 고흥 나로도에서 진을 쳤다. 보고를 받은 선조도 “호남의 일은 유 제독에게 배신당한 것 같다”(‘선조실록’)고 불쾌한 심정을 밝혔다.



고니시의 뇌물 공세, 이순신의 격노

그러나 왜교성 전투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남원에 있던 명군 감찰 왕사기가 유정의 회군을 듣고 화를 냈다. 유정은 어쩔 수 없이 11월 1일 재진군했다. 조명 연합수군도 11일 왜교성 앞바다로 재진격했다. 묘도와 장도를 지키려는 왜선 20여 척을 차례로 격파한 연합수군은 다시 바다를 장악했다.

육지의 유정은 이번에도 좀체 왜교성을 공격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책략에 능한 고니시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고니시는 왜교성 전투 직후 일본 본토에서 온 관리들로부터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사실을 공식 통보받고 조선 철수 명령을 받은 터였다. 조선침략을 지시한 히데요시의 사망(1598년 8월 18일)으로 전쟁을 치를 이유가 없어졌지만, 고니시는 무작정 철수를 거부했다.

“철수에는 화평이 성립되어야 하며, 화평 없이 철수한다면 적에게 반격을 당하여 고전이 예상된다. 지금은 일본 측의 전황이 유리하므로 적군이 새롭게 군사행동을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야말로 화평을 성사시켜야 한다.…일본의 명예를 위해서도 여러 성은 남겨두어야 한다.”(고니시 유키나가의 1598년 10월 10일 書狀, 일본 오사카성 천수각 소장)

고니시는 유정의 육군을 경험해본 결과 전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협상을 하는 한편으로, 기회를 보아 인근의 왜군과 연대해 조명 연합군을 초토화시키려는 게 그의 속내였다. 고니시는 천금(千金)을 제시하면서 밀정을 모집해 인근 사천왜성과 남해왜성으로 왜교성의 상황을 알리게 한 후, 횃불 연락망을 구축했다.

한편으로 고니시는 순천에 도착한 유정에게 사람을 보내 뇌물 공세를 폈다. 유정은 고니시의 화평과 휴전 제의에 선뜻 동의했다. 고니시는 유정에게 왜교성과 전공의 증표인 수급(首級) 및 각종 도구류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유정은 명군 30여 명을 약속 보증용 인질로 고니시에게 보냈다.

고니시는 진린도 따로 회유했다. 진린은 뱃길 퇴로를 터달라는 요청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수차례에 걸친 뇌물 공세에 넘어가 이순신에게도 고니시의 퇴로를 열어주라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호히 거절했다. 조선 수군의 전공을 진린의 공으로 기꺼이 돌려줬던 이순신이지만 왜군을 도와주려는 진린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었다.

“대장이란 화친을 말해서는 안 되는 법이고, 원수인 왜적을 놓아 보낼 수는 없다.”(‘통제사이충무공신도비명’)

이순신의 단호한 말에 진린은 매우 부끄러워했다. 같은 무장(武將)으로서 이순신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느슨해졌던 조명 연합 수군은 다시 단단히 조여졌고 해상 봉쇄는 해제되지 않았다.



왜교성 마을에 출몰한 왜귀(倭鬼)

이순신이 나타나 왜교성 전투에서 죽은 왜귀(倭鬼)의 기운을 누른 전설로 유명한 사당인 순천 충무사. 순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기자는 15일 왜교성(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올라 419년 전 이맘때 치러진 왜교성 전투 상황을 눈에 그려봤다. 왜교성 천수각에서 동남방에 자리한 장도는 육지의 작은 동산처럼 보였다. 왜교성과 장도 사이의 바닷물은 메워져 대규모 산업단지로 변했고, 이순신의 전투 지휘소였던 장도는 토석채취장으로 제공돼 섬의 절반이 파헤쳐졌다. 왜교성 아래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수로 정도가 이 지역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었음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왜교성에서 북쪽으로 1km 거리에는 충무사라는 사당이 있다. 기자는 이 마을(신성리) 출신의 김병연 전 대사(임진정유역사재단 추진위원회 위원장)에게서 조상 대대로 이 마을에 전해져 내려온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충무사를 찾았다. 정유재란이 끝난 지 거의 100년 뒤 이곳에 이주해온 주민들은 밤마다 말발굽 소리와 병사들의 함성이 들리고, 심지어 왜교성 전투에서 죽은 왜귀(倭鬼)들이 출몰하는 바람에 몹시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을 1697년 짓고 제사를 지냈더니 왜귀들의 출현과 소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충무사는 1944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광복 후 지역 유지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1947년 현 위치에 새로 건립했다. 충무사 관리사무실 뒤쪽 마당에는 ‘소서행장지성지(小西行長之城址)’라고 새긴 비석도 있다. 높이가 1m 남짓한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군 사령관이던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제33대 일본 총리)가 고니시의 왜교성 주둔을 기념해 천수각에 세웠던 것이다. 광복 후 마을 주민들이 이 비석을 부러뜨렸는데 해룡면사무소가 역사보존 차원에서 보관해오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왜교성 앞바다를 지키던 이순신은 수군에 대한 유정의 질시와 비협조로 고니시와의 못다 끝낸 싸움을 하기 위해 20여 km 떨어진 관음포 해역으로 마지막 여정을 떠난다. 왜교성 함락이 순리대로 이뤄졌다면 불과 며칠 후 관음포에서의 노량해전(11월 19일)은 불필요했을 테고, 이순신의 전사(戰死)도 없었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순천=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