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토시카타(水野年方·1866~1908)가 그린 사무라이 그림. 인터넷 캡처
인터넷에서는 일본 봉건 시대 무사를 뜻하는 ‘사무라이’가 사실 한국어 ‘싸울아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02년 개봉한 영화 ‘싸울아비’ 역시 이런 주장에 근거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런 주장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걸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실제로 싸울아비가 변해 사무라이가 됐을 확률은 제로(0)에 가깝다. 싸울아비는 서울 배화여고 등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라디오 드라마 극본도 썼던 김영곤 작가(1926~1988)가 1960년대 만들어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를 통해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이 라디오 연속극에서 싸울아비라는 낱말을 처음 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도 TV·라디오 연속극이나 소설, 영화 같은 픽션에서 싸울아비라는 낱말을 쓰면서 이 낱말이 원래 있던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 숫자도 늘어나게 됐다.
반면 일본에서 사무라이라는 낱말은 최소 16세기에 등장했다. 따라서 만약 두 낱말이 연관이 있다면 오히려 일본어 사무라이를 보고 싸울아비라는 낱말을 만들어 냈을 확률이 높다. 물론 실제 가능성은 희박한 이야기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일본어 사전 ‘고지엔(鑛辭苑)’에 따르면 사무라이는 ‘사부라푸(サブラフ)’의 연용형(連用形≒명사형) ‘사부라이(さぶらい)’가 변한 말이다. 같은 사전은 사부라이를 ‘주군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 또는 그 사람’이라고 풀이한다. 사부라이를 한자로 적을 때는 모실 시(侍)를 쓰는 이유도. 사무라이 역시 마찬가지로 한자로 쓰면 ‘侍’다.
그러니까 어원을 따지자면 사무라이라는 낱말에 오히려 ‘싸운다’는 뜻이 없던 것이다. 헤이안 시대 중기가 되어서야 사부라이는 ‘무기를 들고 귀족의 경호를 담당하는 자’라는 뜻을 얻게 된다.
화투패 ‘비광’에 등장하는 오노 도후(小野道風·894~966)가 바로 헤이안시대 인물이다. 오노는 일본 3대 명필로 손꼽힌다. 인터넷 캡처
이후 쇼군(將軍)이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 바쿠후(幕府·막부) 시대를 거치며 일본에서는 부시도(武士道·무사도)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음이 [사무라이]로 바뀐 이 낱말은 “일반 서민(凡下·본게)과 구별되는 신분 호칭으로 기마(騎馬) 복장(服裝) 형벌(刑罰) 등에서 특권적인 대우를 받는 신분”을 뜻하는 단어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이때도 반드시 ‘사무라이 = 무사’였던 건 아니다. 문관이 사무라이를 자처하며 칼(刀)을 차고 다녔다.
결국 싸울아비가 변해 사무라이가 됐다는 건 멀리가도 너무 멀리 간 주장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