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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트렌드/주애진]따뜻한 AI

입력 | 2017-11-20 03:00:00


지난해 방영된 TV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스마트폰 인공지능(AI) 플랫폼을 상대로 상담을 하는 장면. tvN 영상 캡처

주애진 경제부 기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늘 밤 처음으로 남에게 도움 되는 일을 했다는 실감이 들었어.”

일본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3명의 좀도둑이 경찰을 피해 오랫동안 비어 있던 나미야 잡화점으로 몸을 숨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빈 가게로만 생각했던 이곳에서 도둑들은 우체통을 통해 의문의 편지를 받게 된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이상한 힘 덕분에 옛날 사람들이 보낸 상담편지가 현재의 그들에게 날아드는 것이다.

처음엔 누군가의 장난으로 여겼던 도둑들은 어느덧 진지하게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한다. 정성껏 답장을 하면서 이들은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나마 될 수 있다는 점에 뿌듯해한다. 각각의 사연들은 사실 도둑들의 현재와 연결돼 있다. 그들의 조언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 훗날 도둑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식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지렛대가 되는 기적’을 보여준다.

살다 보면 소설 속 인물들처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사람들의 이런 갈망을 채워줄 현대판 나미야 잡화점의 우체통은 정보기술(IT)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애플의 ‘시리(Siri)’나 삼성전자의 ‘빅스비(Bixby)’ 등 최근 쏟아져 나온 음성인식 인공지능(AI) 플랫폼이 하나의 예다.

이들 AI 플랫폼은 원래 간단한 검색이나 전화 걸기 등 생활의 편리를 위해 등장했다. 하지만 기분에 맞는 음악을 골라주거나 심심할 때 말을 걸면 재치 있는 답을 들려주는 것까지 척척 해내고 있다. 지난해 방영된 한 TV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시리’에게 연애상담을 할 때만 해도 그 모습은 폭소를 자아냈다. 이젠 친구처럼 정답게 이들 AI 플랫폼을 부르는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첨단 기술이 소소한 즐거움과 재미를 넘어 더 의미 있는 조언자의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미국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급격한 기술 변화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AI를 ‘똑똑한 도우미(IA·Intelligent Assistant)’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서 ‘늦어서 고마워(Thank you for being late)’를 통해 그는 AI 등의 기술이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런업닷컴’은 프리드먼이 소개한 ‘똑똑한 도우미’ 중 하나다. 2012년 알렉시스 링월드가 창업한 이 회사는 구직자와 회사를 연결해주는 온라인 교육 플랫폼이다. 이곳에서 연결해주는 일자리는 4년제 학위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 직종이다. 링월드는 이런 직업의 지원자 대부분이 회사에 대한 기본 정보도 없이 무작정 지원하고, 기업들은 훌륭한 지원자를 골라내는 데 애를 먹는다는 점에 착안했다. 런업닷컴은 해당 회사나 직종에 대한 정보를 한두 시간짜리 온라인 교육으로 제공하고 이를 수료한 사람이 그 기업의 면접 기회를 얻도록 돕는다.

흥미로운 점은 런업닷컴이 구직자들이 면접을 볼 때 궁금한 점이나 유의할 점에 대해서도 조언해준다는 것이다. 이 사이트에 면접날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지, 면접에 늦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이들도 많았다. 저소득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일수록 취업에 관한 조언을 얻을 통로가 부족하다고 링월드는 지적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런 초보적인 조언을 필요로 한다”며 “누구나 ‘나는 당신을 믿어요’라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잡화점의 우체통에 상담편지를 넣은 이들이 바랐던 건 ‘정답’이 아니다. 누군가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고 도와주려고 노력한다는 점에 힘을 얻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낡은 우체통보다 더 강력한 수단을 갖고 있다. 이를 서로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지렛대로 활용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따뜻한 기술’이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주애진 경제부 기자 ja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