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국회를 통과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은 갈등과 조정을 수차례 거치면서 여야가 서로를 설득하고 합의해 만들었다. 동아일보DB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좋은 정치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이 잘 통치하고 잘 통치받는 일을 번갈아 하는 것’이라 보았다. 통치자가 늘 같다면 민주주의는 아닐 것이다. 통치자일 때든 피통치자일 때든 서로 협력할 수 없다면 적대와 분열을 피할 수 없는 게 인간 사회다. 여야가 통치의 역할을 번갈아 하는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다르지 않다. 정권 교체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아닐 텐데, 여당일 때 야당 시절을 잊고 야당이 되어서 여당일 때를 망각한다면 좋은 정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야당이 과거 여당이었을 때 ‘좌익정권 10년 적폐청산’을 외쳐놓고 이제 와서는 야당 탄압이라 항변하는 것도 우습지만, 반대로 지금 여당이 과거 여당과 같이 적폐청산을 내걸고 통치하는 모습을 좋다고 보긴 어렵다.
좋은 통치란 무엇일까? 옛 철학자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시민들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동체의 도덕적 기반을 가꿔가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확장하고자 했던 존 스튜어트 밀 역시 같은 생각을 말했다. 그는 자신의 책 ‘대의정부론’에서 최선의 정부를 논하면서, ‘구성원 자신들의 덕성과 지성을 증진시키는’ 정부를 높이 평가했다. 그렇기에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게도) 여성에게도 평등한 참정권이 주어져야 하고, 노동자들에게도 공정한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어야 하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만이 아니라 사상과 취향의 자유 역시 억압되지 않아야 공적 토론의 질을 높여 좀 더 나은 진리 위에 사회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03년 집권한 노무현 정부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기, 그리고 권위주의 시기의 인권 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를 조사할 수 있도록 일찍부터 입법 논의를 시작했다. 지금 정부 같았으면 그런 일은 적폐 야당 때문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라 손사래 쳤겠지만, 그때는 달랐다. 팽팽한 논쟁 끝에 여야 합의로 법안은 상임위에 상정되어 심의가 이루어졌고, 수많은 갈등과 조정을 거쳐 2005년 5월 극적인 합의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 덕분에 4년여에 걸쳐 불행한 과거사를 하나하나 정리할 수 있었고, 역사의 시간을 앞으로 이끌 소중한 토대를 만들었으며, 여야 합의로 만든 법에 근거한 것이기에 소모적인 이념 갈등 또한 최소화할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이런 노무현 정부의 방식을 이어가지 않고 박근혜식 적폐청산 정치를 불러들인 것을, 필자로서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이제라도 이 기본법을 다시 보완해 ‘과거사정리위원회 2기’를 이어가야 할 것이고, 강권적 국가기구들의 불법적 정치 개입을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입법 노력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민주주의는 법으로 통치하는 체제다.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