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절실한 중증외상센터]‘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이 말하는 北귀순병-외상센터
23일 경남 창원시 해군교육사령부 충무공리더십센터에서 만난 석해균 선장이 와이셔츠 소매 단추가 풀려 있는 오른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석 선장은 아덴만 여명작전 당시 입은 총상 후유증으로 왼손이 거의 마비돼 지금도 오른쪽 소매 단추를 끼우지 못하고 풀어놓는다. 창원=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
“총 맞았을 때 너덜너덜해져서 ‘못 쓰겠구나’ 했어요. 그걸 이국종 교수가 살려놓은 거라고.”
○ 이 교수 영상 공개 요청에 “그래, 그리 해라”
퇴원 후 석 선장과 이 교수는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됐다. 이 교수의 왼쪽 눈이 실명 직전이고 고혈압 약을 먹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이 교수 볼 때마다 ‘몸 좀 그만 혹사시키라’고 해요. 그럼 이 교수는 ‘일이 밀려서 안 된다’고 하고. 안쓰럽지.”
석 선장은 89세 노모를 돌보고 있다. 모친의 건강이 안 좋으면 자정에도 연락해 조언을 얻는 사람이 이 교수다. 석 선장이 증상을 설명하면 이 교수가 필요한 약품을 일러준다. 이 교수의 긴급 처방 덕분에 석 선장 어머니는 여러 번 기력을 되찾았다. 석 선장은 “알뜰살뜰 사람을 챙기는 의사”라고 했다.
그런 이 교수에게서 21일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북한 귀순 병사를 살려낸 뒤 휘말린 ‘인권 테러’ 논란에 대해 이 교수가 작심하고 반박한 언론 브리핑 하루 전이었다. “선장님 수술 영상을 공개해도 되겠느냐”는 이 교수의 조심스러운 요청에 석 선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단 1초도 고민 안 했어요. ‘그래, 그리 해라’ 이렇게만 말했어. 이 교수에게 ‘쇼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나요. 죽다 살아온 내가 증인인데.”
“외상 의사가 지킬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인권은 환자 목숨을 살리는 것 아닙니까. 병원에서 살아난 환자들이 인권 운운하며 이 교수를 비난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석 선장은 권역외상센터를 확대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참여했다. “여러 ‘이국종(의료 인력)’, 여러 ‘석해균(생존 환자)’이 계속 나와야 해요. 외상센터 수혜자가 대부분 우리 산업의 밑바닥을 지탱하면서도 병원비 감당이 힘든 블루칼라 근로자들입니다.”
○ “귀순병 그 친구, 나하고 같아요”
‘석해균 선장님, 이곳은 대한민국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처음 깨닫던 순간의 경이로움. 귀순병 친구도 똑같이 느꼈을 겁니다.”
이 교수팀의 수술 후 13일 만에 깨어난 석 선장은 2011년 3월 병상에서 생일을 맞았다. 그는 의료진이 준비한 축하 케이크에 초를 하나만 꽂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에겐 다시 태어난 날, 한 살로 되돌아간 날이었다. 환갑이 넘은 그가 “올해 일곱 살”이라고 한 이유다.
“귀순병 그 친구, 나하고 같다고 생각해요. 이제 한 살로 다시 살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지난 25년간 얼마나 고생했겠어.”
생사의 갈림길을 먼저 지나온 선배로서 석 선장은 귀순 병사에게 조언했다.
“큰 고비는 넘겼지만 이제 부정적인 감정이 밀려올 거예요. 건강할 땐 상상도 못 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올 겁니다. 그럴수록 긍정적으로 마음먹어야 회복도 빨라져요.”
석 선장도 의식을 회복한 뒤 움직이지 않는 왼손, 여기저기 꿰맨 몸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후 넉 달간 죽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리다 얻은 깨달음이었다.
○ ‘항상 전쟁터에 있다’
배의 키를 내려놓은 석 선장은 2012년부터 6년째 경남 창원시 해군교육사령부에서 안보교육관으로 일하고 있다. 군인 경찰 소방관 등 공무원과 일반인을 교육하며 자신의 경험담을 나눈다. 얼마 전 교육생이던 소방관이 그에게 “선생님 덕에 살았다”며 인사를 하러 왔다. 화재 현장에서 불길에 갇혀 버린 순간 석 선장을 떠올리며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이 교수가 살린 건 단지 저 하나뿐이 아닙니다. 아직 살아있는 저를 보면서 절망을 이겨낸 사람들까지 살려낸 겁니다.”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진 않았다. 총탄이 관통해 피부가 괴사한 오른쪽 등에는 하루 5, 6차례 원인 모를 통증이 찾아온다.
“아플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끙’ 하고 신음을 내며 견디는 거예요. 교회에 가면 ‘고통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해요.”
지난해 10월 근무 도중 갑자기 장폐색이 왔다. 장으로 가는 피가 안 통해 심할 경우 장 조직이 괴사하는 병이다. 응급조치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 석 선장은 헬기에 태워져 아주대병원으로 이송됐다. 워낙 복잡한 수술을 받았던 터라 석 선장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는 이 교수밖에 없었다. 약물 처방을 받은 석 선장은 8일 만에 회복됐다.
석 선장의 해군사령부 사무실 벽에는 ‘恒在戰場(항재전장)’이라고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항상 전쟁터에 있다’는 뜻. 그가 액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상에서 회복하는 과정도 일종의 전쟁이죠. 지금껏 잘해 왔으니 앞으로도 포기 안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석 선장은 자신의 차에 올라타 핸들을 잡았다. 주먹을 쥐는 데 5년 걸린 왼손도 핸들에 얹었다. “조금만 더 하면 왼손으로 소매 단추를 끼워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지가 눈앞이오.” 그는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졌다고 했다. “예전에는 다른 차가 끼어들면 쫓아가서 삿대질을 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였어요. 지금은 ‘나보다 더 바쁘구나’ 하면서 비켜준다고. 하하.” 석 선장이 ‘전투’에서 이기고 있는 방법은 긍정이었다.
창원=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