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암 이긴 공부열정… 75세 할머니의 수능

입력 | 2017-11-25 03:00:00

만학의 집념 활활 차영옥씨
못배운 恨 풀려 평생학교 등록… 2년간 결석 한번 않고 과정 마쳐
“사회복지 전공 홀몸노인 돕고파”




“조심조심 잘 찍고 오소.”

23일 오전 7시 서울 마포구 홍익대 부속여고 앞. 김훈석 씨(83)가 아내 차영옥 씨(75·사진)에게 도시락을 건네며 말했다. 새벽부터 준비한 누룽지 도시락이다. 인천 백령도에 사는 아들 김승진 씨(52)는 꽃다발과 찰떡을 드렸다. 칠순을 훌쩍 넘겨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노모를 위한 것이다. 차 씨의 눈은 부어 있었다. 시험장에 오기 전 “어머니가 드디어 소원을 푸셨다”며 감격해하는 아들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차 씨의 수능은 만학도의 도전 이상의 의미가 있다. 30년 전 차 씨는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위 전체를 잘라냈다. 음식을 소장으로 소화시킨다. 한 끼에 밥 한 그릇을 다 먹어본 적이 없다.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두통에 시달린다. 5분 전 암기한 것도 잊어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공부가 안 되면 나를 살린 항암제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물 한두 방울이 계속 떨어져 바위에 구멍이 나듯 (수업을) 계속 들으면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겠냐는 믿음으로 공부했어요.”

차 씨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6·25전쟁이 터지고 1·4후퇴 때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해 중등교육을 받지 못한 게 늘 한이었다. 그는 “배움에 대한 열정은 언제나 가득 차 있었다”고 말했다.

시련은 계속됐다. 6년 전 췌장암 수술을 받았다. 2년 전엔 넘어져 갈비뼈 여섯 개가 부러졌다. 지금도 복대를 차고 생활한다. 올 2월 받은 백내장 수술 탓에 2시간 이상 책을 보기도 힘들다. 차 씨는 “하늘이 나에게 공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게 아닌가 싶어 원망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차 씨는 일성여중고에 다닌다. 만학도에게 중·고등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2년제 학력인정 평생학교다. 그는 2년 동안 결석 한 번 하지 않았다. 차 씨가 ‘내 반쪽’이라고 부르는 남편의 지원도 큰 힘이 됐다. 남편은 매일 오전 차 씨의 책가방과 도시락을 들어주며 지하철로 40분 거리 학교를 왕복했다. 이날 오후 5시경 시험장을 나오는 차 씨를 교문 앞에서 반긴 사람도 남편이었다.

내년 2월 졸업을 앞둔 차 씨는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해 홀몸노인을 돕고 싶어 한다. 위암 투병 당시 자신을 돕던 사회복지사를 보며 다짐한 꿈이다. 수능 결과에 상관없이 남은 대입 전형에 도전할 생각이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